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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하염없이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주인을 애타게 기다리는


고문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이번에 소개해드릴 문서는 비교적 시대가 늦은 것으로


지금으로부터 100년밖에 안 된 따끈한(?) 근대 문서인 '도강기(都講記)'입니다.


이 문서의 소장자가 누구이며, 또 어느 곳에 있는지 저는 모릅니다.


그저 인터넷에서 발견해 분석하고 연구한 것입니다. 


사실, 근현대사 부분은 제가 전문적으로 하는 파트가 아니라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게다가 '도강기(都講記)'란 문서에 대한 연구가


일절 이루어지지 않아서 참고할 논문 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설명의 오류가 있더라도 양해 부탁드립니다. 






예전에도 성적통지서가 존재 했나 봅니다.


바로 오늘날 성적통지서에 해당하는 '도강기(都講記)'라는 문서입니다. 


도강(都講)이란 말은 서당에서 흔히 쓰이던 어휘로


'종합시험'을 의미하는 우리 고유의 전통 용어입니다. 


근대학교에서도 이런 종합시험인 '도강'을 


일년에 2번 즉, 하절기와 동절기를 나누어 보았으며 


종합시험 성적을 기록한 성적표인 도강기를 작성한 것이죠. 


그럼 이제 문서를 천천히 살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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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 첫머리엔 


'관립 영어학교(官立 英語學校)'라고 적혀 있네요.


관립 영어학교는 1895년 을미개혁의 일환으로 설립된 외국어학교 중 한 곳으로 


당시에 한어(중국어)/일어(일본어)/영어/법어(불어)/덕어(독일어)/아어(러시아어) 


6개 언어를 가르치는 학교가 존재했다고 합니다. 


1882년 맺어진 조미수호통상조약엔 


거중조정(제3국이랑 분쟁이 일어날 경우, 조약 맺은 상대자가 중간에서 중재해주는 것)의 조항이 삽입되었습니다. 


이로써 조선의 우방국이 된 신흥 강대국 미국과의 교섭이 중요시 됨에 따라 


영어학교는 한어나 일어와 같이 2-3년의 단기 과정이 아니라,


무려 5년을 수학과정으로 하여 15살에서 20살 사이의 인재들을 모아 공부시켰다고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조선이 그저 둔하고 미련한 나라는 아니었던 판단됩니다. 


오늘날 4년제 대학의 수학연한보다 긴 교육과정을 지니고


전략 언어를 가르칠 정도로 깨어 있었으니깐요. 


그 다음을 읽어 볼까요?



i15000742084.jpg

제2반 제5좌 이원기(李源綺)라고 적혀 있네요. 


'이원기'라는 학생의 성적표임이 확실합니다.


그런데, 이 학생은 공부가 비교적 뛰어났나봅니다. 


2반에 속해 있습니다. 


성적이 좋은 우수생들은 1반이나 2반.


앞자리 수에 해당하는 반에 들어 갔다 하니깐 말이죠. 


'五座(오좌)'라는 말은 5번째 자리에 앉아 


공부하는 학생이라는 뜻일 겁니다. 


즉, 지금의 출석번호로 보입니다.


그 다음에 보이는 것이 당시 영어학교에서 배웠던 과목들입니다. 


100여년 전 조선의 영어학교에선 무엇을 배웠는지 알아 봅시다. 


한글자씩 읽어봅시다. 


영어번역(英語繙譯)/한문번역(漢文繙譯)/


독법(讀法: Reading)/작문(作文: Writing)/서취(書取: Dictation)/


회화(會話: Speaking)/산술(算術: Arithmetic)/사자(寫字: Lettering)/


문법(文法: Grammar)/지리(地理: Geography)


무려 10과목을 배웠습니다. 


만만치 않습니다. 


당시 외국어학교에선 한문을 영어로, 영어를 한문으로 번역하는


한-영번역(漢英繙譯)을 주로 한 것으로 보입니다. 


산술(셈법 또는 수학)과 지리 역시, 원어 그대로 서양의 수학과 지리를 배웠다 합니다. 


당시 외국어학교를 다닌 사람들의 증언입니다. 


정말 강도높은 교육이었던 걸로 보입니다. 


지금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없는 교육을 시켰네요. 


그럼 이젠 이원기 학생의 성적을 살짝 훔쳐(?)보도록 합시다.


참고로 당시 도강기는 부모님께도 통지했다고 하니,


학부모가 읽을 수 있도록 영문이 아닌 한문으로 기록했나 봅니다. 


우리는 현재 학교 선생님이나 부모님만이 볼 수 있던


100년 전 조상님의 성적표를 몰래 보고 있는 셈입니다. 


'원획(原畫)'이란 글자가 보입니다. 


원획은 총점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획(畫)은 '긋다'라는 의미의 '획'입니다.


예전 전통서당에서 강(講:시험)을 볼때, 맞고 틀림에 따라


훈장님이 획을 그어 취득 점수를 매겼다고 합니다. 


이를 강획(講畫)이라고 불렀습니다. 


서당에서 쓰던 기존 용어를 개혁하지 않고 그대로 신식 외국어학교에 적용한 점이 특이합니다. 


이런 면을 볼 땐, 조선 정부의 정책은 모든 것을  한번에 바꾸는 급진 개혁이 아니라 


서서히 바꾸어 나가는 소위 연착륙 성향의 개혁을 추구한 것으로 봐야 합니다.


계속 가봅시다. 


그 다음엔 강획이 보입니다. 


강획은 학생이 득점한 점수입니다.


평균획이 또 보입니다.


평균획은 전체 학생의 평균 점수일 겁니다.  


즉, 영어번역의 총점은 100획인데


이원기 학생은 강획(講畵:득점) 65획을 획득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잘 본 것일까요? 


평균 점수인 '평균획'이 적혀 있으니, 우열여부를 알 수 있습니다.


학생들의 평균점수는 56획입니다.


평균보다 9획이 높은 우수한 성적입니다. 


이원기 학생은 이번 도강의 영어번역시험을 잘 본 거 같습니다.


다른 과목을 봅시다. 



한문번역은 66획(평균점수 67획)


리딩점수는 68획(평균 68획)


라이팅 점수는 82획(평균 68획)


딕테이션 점수는 98획(평균 90획)


산술(算術:수학) 점수는 67획(평균 62획)


사자(寫字: 영자로 필기체 쓰기) 점수는 84획(평균 74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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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점 670획 만점에 530획을 획득했습니다.


학생들의 평균점수는 485획입니다.


이원기 학생은 다른 학생들보다 평균 45획이 높습니다.


상급반에 속했던 우수생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회화와 지리 그리고 문법은 시험을 보지 않았던 거 같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2학년 과목이 아니어서 그랬나 봅니다.


그저 제 추측에 불과 합니다. 


계속 도강기를 분석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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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칸에는 번외로 본 한문사자(漢文寫字:서예) 점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83획을 취득했습니다.


외국어학교에서 서예도 가르쳤나 봅니다. 


아무튼 신기합니다. 


그 다음 칸에는 '본반현유이십인(本班現有二十人)'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2반의 학생 총원이 현재 20명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다음칸부터는 이원기 학생의 생활 기록 사항으로 보입니다 .


'취교(就校)'는 학교를 얼마나 잘 나왔느냐를 평가한 거 같습니다.


'호(好)'는 그냥 좋다라는 의미입니다. 


오늘날로 치자면 수우미양가중에 '우(優)'에 해당하는 거 같네요. 


'품행(品行)'은 말그대로 품성과 행동입니다.


이원기 학생의 인성이 궁금해지네요. 


한번 볼까요?


'甚好而最喜嬉笑(심호이최희희소)'라 적혀 있습니다.


부족한 실력이지만 한번 해석해 보겠습니다.


'심히 좋으나, 가장 좋아하는 행동은 장난스레 웃는 것'이라고 평가했습니다. 


품행은 아주 단정했지만 이원기 학생은 깔깔 거리며 웃는 걸 상당히 좋아했나 봅니다.


선생님들에게는 이원기 학생의 이러한 천진난만한 행동이 인상적이었나 봐요. 


재밌습니다. 


심호(甚好)는 수우미양가 중에 '수(秀)'에 해당하는 걸로 판단됩니다. 


계속 가 봅니다.


진익(進益)은 학업 성취도입니다. 


'甚好(심호)'라고 적혀 있는 걸로 보아 


실력은 날이 갈수록 일취월장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머리 좋은 학생이었네요. 


아랫부분에 총교사(總敎師:수석교사)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할치신(轄治臣)입니다.


분명 우리나라 사람은 아닙니다.


누굴까요? 저도 인터넷에 찾아보았습니다.


영국인 교사인 허치슨이란 분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허치슨을 검색해 보았습니다.


앗! 


허치슨의 기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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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실록 39권, 고종 36년 5월 20일 양력 4번째기사 


1899년 대한 광무(光武) 3년 영어 교사 허치슨에게 종2품 금장을 하사하도록 하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영어 교사 허치슨〔轄治臣 : Hutchison, W. du. F.〕 【허치슨】 이 다년간 교육에 종사하여 수고를 한 것이 가상하니, 특별히 종2품 금장(金章)을 하사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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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교사로 관립 영어학교에 재직한 것이 확실하고, 


교육의 공로가 지대하여 황제로부터 금장을 하사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역시 조선왕조실록엔 별게 다 기록되어 있네요.


마지막으로 도강기가 발급된 연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건양 원년 1월입니다. 


'건양'은 을미개혁의 일환으로 태양력을 사용하기 위해 김홍집 내각에서


발표한 우리나라 연호입니다. 


건양 원년은 1896년(고종 32년)입니다. 


즉, 기말고사 성적표는 1896년 1월에 발송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도강기는 여기서 끝이 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원기 학생의 근황이 궁금합니다.


어떻게 살았을까요? 


우수한 학생이었으니 근대화에 헌신한 인재로 거듭났을까요?


조선왕조실록을 찾아보았습니다.


하지만...검색 기록이 없습니다. 


난감합니다. 하지만, 더 상세한 기록물이 있습니다.


바로 승정원 일기입니다. 


승정원 일기를 검색해보았습니다.


그 결과...














이원기(李源綺) 학생의 이름이 보입니다!


1886년부터 그의 행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영어학교 학생 이원기가 승정원 일기에 등장하는 이원기와


동일 인물일까요?


일단, 계속 분석해 봅시다. 


승정원일기 2953책 (탈초본 135책) 고종 23년 10월 16일의 기사에 보면 


1886년 승문원 사자관 이습(수습생) 이원기에게 군직을 부여하고, 


관대를 착용해 일을 보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를 통해 이원기이라고 지칭되는 인물은 중인 가문의 자제였던 걸로 보입니다. 


사자관은 글씨를 쓰는 관리를 의미하는데


역학,의학,산학,율학과 더불어 중인들이 세습하던 직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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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 일기의 기사를 읽다가 의미있는 부분을 발견했습니다.


1894년 승문원 사자관의 실직(實職)에 오른 이원기의 이름이 갑자기 보이지 않다가, 


1899년에 다시 양지아문 기수보(技手補)가 되어 등장합니다. 


1895년은 영어학교가 개교한 날이며, 1899년은 영어학교의 첫 졸업생이 배출된 해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영어학교는 수학기간이 5년이니, 정확히 맞아 떨어집니다. 


즉, 이원기 학생은 승문원의 사자관으로 근무했는데 


1895년 영어학교가 개교하자, 


영어를 배우기 위해 관립 영어학교에 입학한 관계로 


승정원 일기에서 그의 행적이 사라졌고


1899년 영어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다시 양지아문의 관리가 되어 승정원 일기에 재등장한것입니다. 


분명, 영어학교의 이원기 학생과 동일 인물임에 틀림 없습니다. 


정말 조선의 기록 정신은 위대합니다.


세계 최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뭉게구름처럼 뭉게뭉게 피어나고 있습니다.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기록유산 분명 맞습니다. 


조선의 중인계층은 조선 사람 가운데서는 의식이 개명(開明)한 사람들이었고,


역관계층을 이루던 부류라 그들이 외국어학교에 입학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원기 학생이 양지아문의 기수보가 된 건 무슨 이유일까요?


양지아문은 광무개혁의 일환으로 1898년 전국의 토지를 측량하기 위해 


설치한 탁자부 산하의 관청입니다. 


토지측량은 근대화를 위해 필수불가결한 작업입니다.


특히, 광무개혁으로 인해 한양도성은 많은 발전이 있었습니다. 


소공동엔 미국의 월스트리트와 같은 은행가가 조성되었고 


종로엔 전차가 부설되었고, 가로등이 설치되었으며


지저분한 가가(假家)가 철거되며 하천과 도로 정비가 이루어 졌습니다. 


이런 작업 덕분에 외국인들은 5년전과 달리 크게 발전한 한양 거리를 보고


극찬 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근대적 도시정비를 위해선 토지 측량이 필수적이었던 겁니다.


이 측량을 도맡던 인물은 바로 미국인 크럼 (Krumn, R.E.L., 한문명은 거렴-巨廉)인데 


정부는 이 크럼을 양지아문의 수기사로 임명해 


이원기와 같은 한국인 출신의 기수보를 가르치며 향후엔 전국 토지를 측량하려고 계획했던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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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의 원활함을 위해 영어학교 출신인 이원기를 양지아문으로 보내 


기수보(技手補)의 임무를 맡겼던 겁니다. 

   

승정원 일기에 기록된 이원기의 행적은 일관되게 양지아문의 일을 맡았던 걸로 보입니다.


하지만, 1906년을 마지막으로 그의 이름이 보이지 않습니다.


탁지부 양지아문의 기수직을 의원면직하며 퇴직해 버린 겁니다. 


그 이유는 대한제국이 일본과의 병합화가 진행되면서 더이상의 근대화 작업이 중단되었기 때문이죠.


참으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근대화 시켜주었다고 배웠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습니다.


1876년 개항이후, 꾸준히 우리 손으로 근대화 작업이 이루어 졌으며


그에 따라 필요한 인재들도 육성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탈하지 않았다면, 분명 우리의 자력으로 근대화의 숙원을 이룰 수 있었을 겁니다.


자력으로 근대화가 이루어졌다고 주장하시는


근현대사 연구의 대가이신 서울대 이태진 교수님의 학설이 옳다고 보여집니다. 


이원기 학생은 얼마나 침울했을까요?


배울만큼 배워서 이제 막 조국의 근대화를 위해 


헌신하려하던 차에 망국을 맞이 했으니깐요. 


장난치며 천진난만하게 웃는 것이 트레이드마크였던


그의 해맑던 미소도 나라의 부침과 함께 사라졌을 겁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당 내용에 오류가 있으면 알려 주세요.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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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LBPARK 장수찬님 글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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