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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노예 사세요, 쌀 두 가마니면 됩니다"

기사입력 2014-10-21 10:04 최종수정 2014-11-19 14:35
[오마이뉴스 박석분 기자]

"남쪽은 (조선의) 목구멍과 같으니(南?咽喉) 서문을 자물쇠와 같이 튼튼히 지켜야 한다(西門鎖?)."



부산진시장 뒤편에 산책코스로 아주 좋은 성터가 있다. 부산진지성이다. 임진왜란이 난 이듬해인 1593년, 왜장 모리 테로모토 부자가 원래 부산포에 있던 조선 외성을 헐고 일본식 성으로 다시 만든 성이다.

이 성은 왜군의 지휘소로 이용되었으며 이곳에서 수많은 조선 노예들이 팔려나갔다고 한다. 조선 노예의 값은 한 사람당 2.4스쿠도(포르투갈 화폐단위)로, 쌀 두 가마니 정도였다. 당시 아프리카 흑인 노예 값이 한 사람당 170스쿠도였다 하니 조선 노예의 처지가 얼마나 비참했는지 알 수 있다. 이 영향으로 국제 노예 값의 폭락을 가져왔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조선인들은 일본은 물론, 당시 포르투갈령 마카오를 경유하여 유럽으로 팔려나가기도 했다.

왜구들은 조선 민중을 원숭이처럼 목에 노끈으로 엮어묶고 이 끈을 우마가 끄는 달구지에 매달아 뒤따라가게 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45025





dongA.com

2017-09-09 03:00:00 편집


[토요기획]

“조선인 돈된다”… 아이-여자까지 새끼줄로 목 묶어 끌고가

잊혀진 전쟁 ‘정유재란’<10> 10화: 조선인 노예사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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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나고야성 일대를 묘사한 ‘히젠나고야성도병풍(肥前名護屋城圖屛風·나고야성박물관 소장)’ 그림(왼쪽)과 현재의 나고야성 일대(오른쪽). 왜군들의 조선 침략 사령부다.




“일본에서 온갖 상인들이 (조선으로) 왔다. 그중에 사람을 사고파는 자도 있었다. 본진의 뒤를 따라다니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사들였다. 새끼로 목을 묶은 후 여럿을 줄줄이 옭아매 몰고 가는데, 잘 걸어가지 못하면 뒤에서 몽둥이로 두들겨 팼다. 지옥의 아방(阿房)이라는 사자가 죄인을 잡아들여 괴롭히는 것이 이와 같을 것이다.”(‘朝鮮日日記’, 1597년 11월 19일)

왜군의 종군의승(從軍醫僧)인 게이넨(慶念)은 조선인들을 원숭이처럼 묶은 뒤 우마(牛馬)를 끌게 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가게 하면서 볶아대는 일본 상인들의 행태를 차마 눈으로 볼 수 없다고 기록했다.


 정유재란 발발 첫해 초겨울, 호남을 비롯한 대부분의 남부 지방이 왜군의 수중에 떨어진 때였다.
조선은 당시 일본 상인들에게는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의 시장이었다. 왜군을 따라 조선에 들어온 상인들은 군량과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한편으로 사람 매매에까지 손을 댔다. 특히 사람 장사는 최고의 이문이 남았다.
 
상인들에게 조선인을 파는 주체는 왜군이었다. 전쟁 이전 왜구들이 조선 해안지역을 침탈해 조선인을 잡아가 일본에서 강제 노역을 시키던 것과는 전혀 성격이 달랐다. 왜군은 조선인을 잡으면 현지에서 일본인 인신매매상에게 팔아넘기거나 일본으로 끌고 가 평생토록 노비로 부려먹었다. 이 때문에 전쟁 도시인 나고야성은 조선인 포로들로 넘쳐났다. 정유재란 때 칠산도에서 왜군에게 붙들려간 정희득은 “귀국 도중 들른 나고야성에서 마주치는 사람 중에 반 이상이 조선인이었다”(‘月峯海上錄’)고 기록했다.


조선인 노예들의 고혈로 흥청거린 군사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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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여 개의 다이묘 진영들이 들어서 있던 나고야 성터. 사가현=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나고야성으로 끌려온 조선인 포로들은 일본 내 각 다이묘들의 영지로 끌려가거나, 당시 국제무역항이던 나가사키로 옮겨져 노예로 팔려나갔다. 일부 다이묘들은 처음부터 조선인들을 노예로 팔 요량으로 나고야성 남쪽의 나가사키 항으로 곧장 입항하기도 했다.


포르투갈까지 개입한 국제 노예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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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일본 나가사키항에서 포르투갈 상인들과 예수회 선교사, 일본인들이 교류하는 장면을 담은 ‘남만병풍(南蠻屛風)’.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노예로 파는 데는 포르투갈인들이 적극 개입돼 있었다. 당시 전 세계 노예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포르투갈 노예상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간사냥으로 악명이 높았다. 포르투갈 노예상들의 사주를 받은 일본인들은 조선인 납치를 일확천금의 기회로 생각했다.


“전진(戰陣)의 (왜군) 제장(諸將) 가운데 약삭빠른 자는 처음부터 인신매매를 목적으로 조선인들을 대량 노략질해오기도 했다. (노예시장으로 흥성했던 나가사키의) 일부 일본인들은 조선인을 붙잡아오기 위해 조선으로 도항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은 조선 남부 등 각지를 찾아다니며 남녀를 막론하고 조선인을 직접 사들여 나가사키 등지로 끌고 가 포르투갈 상인에게 철포(조총)나 비단을 받고 팔아넘겼다.”(‘耶蘇會宣敎師の朝鮮俘擄救濟敎化’)


심지어는 포르투갈 상인이 조선에 들어와 직접 거래했다고 볼 수 있는 자료도 있다. 포르투갈 상인들이 왜군이 조선 남부 지방에 주둔하고 있을 때 일부러 현지에 인매선(人買船·노예매매선)을 보내 조선 포로를 직접 수용했다는 기록(1598년 9월 4일, 日本耶蘇會 宣敎聖職者會 報告)과, 전쟁이 끝난 후 조선의 비변사가 심문한 포로들 중에 포르투갈 상인 조앙 멘드스, 남만계 흑인 1명 등도 있었다(1604년 6월 22일, ‘등록유초’)는 공초 기록이다.


일본의 국제무역항인 나가사키(長崎)와 히라도(平戶) 등지에서 매매된 조선인들은 홍콩, 마카오, 마닐라를 비롯해 인도, 유럽에까지 팔려나갔다.
“놀라울 만큼 많은 조선 포로가 일본으로 송치돼 주로 나가사키 방면에서 팔렸다. 포르투갈 상인은 이로써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耶蘇會宣敎師の朝鮮俘擄救濟敎化’)

돈이 되는 인신매매에는 기리시단(가톨릭) 다이묘들도 적극 개입돼 있었다. 당시 유럽 선교사들이 인신매매에 개입한 가톨릭 다이묘들의 파문을 결정할 정도로 대규모로 행해지고 있었다. 다이묘와 병사들 할 것 없이 조선인 노예 획득과 매매에 열을 올렸으니 정유재란은 노예전쟁이기도 했다.(‘壬辰·丁酉倭亂時 朝鮮俘虜奴隸問題’)

넘쳐나는 조선인 노예들로 인해 전 세계 노예시장의 가격이 하락할 정도였다. 조선인 부녀자와 아이의 경우 한 명 가격이 당시 일본의 화폐 단위로 약 2∼3문 정도였다. 조총 1정 값은 120문이었다.

1598년 3월경 당시 나가사키에 머물렀던 이탈리아 상인 프란치스코 카를레티는 “조선에서 남자와 여자, 소년과 소녀 등 나이를 가리지 않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붙잡혀 왔다. 이들은 모두 극히 헐값에 노예로 팔려나갔다”(‘나의 세계 일주기’)고 기록했다.


카를레티는 12스쿠도(scudo·포르투갈 옛 화폐단위·일본 화폐로는 약 30엔)를 지불하고 조선인 5명을 사들였다. 카를레티는 이들을 나가사키의 예수회 교회에서 세례를 받도록 한 뒤 인도로 데려가 4명을 풀어주고, 나머지 한 명은 이탈리아 플로렌스(피렌체)까지 데려가 자유인으로 방면했다. 카를레티는 그 한 명이 로마에 있을 것이며, 이름이 ‘안토니오’로 알려져 있다고 기록했다. 이후 안토니오는 로마에 정주하면서 교회 일에 종사하다가 화가 루벤스의 눈에 띄어 ‘한복 입은 남자(Man in Korean Costume)’의 그림 모델이 됐다고 한다(그림 속 모델이 한국인이 아닌 중국인이라는 등 여러 이설도 있다).


여성들은 노동력 착취에 이용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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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나고야 만에 떠 있던 조선 침략 전선들을 내려다보던 터임을 알려주는 기념비(오른쪽). 왜군들은 조선인을 납치해 히젠나고야성, 나가사키 등지로 끌고 와 노예로 팔거나 노비로 부렸다(왼쪽).



여성 피로인들은 주로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노동 인력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됐다. 조선에서는 곡물 운송을 하거나 면화나 화곡을 거두어들이는 단순 노동에 주로 투입되었다. 일본으로 끌려가서는 다이묘의 집안 노비나 하녀가 돼 죽을 때까지 비참한 생활을 했다. 미모와 재능이 출중하거나 신분이 높은 여성의 경우, 지배층의 부인(夫人)이나 첩(妾)이 되기도 하였다.(‘임진왜란에 납치된 조선인의 일본 생활’)


정유재란 시기 조선인 납치 규모는 어마어마하다. 한국 학계에서는 10만 명 규모로 보는 반면, 일본 측은 처음에는 5만∼6만 명으로 추정하다가 현재는 2만∼3만 명 수준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본 측 주장은 역사적 기록에 비춰 터무니없이 축소된 것으로 여겨진다.


1617년 경상도겸사복(慶尙道兼司僕) 정신도가 피로인 전이생(全以生)의 서한을 소개하는 상소문에서는 “전이생과 같은 처지로 사쓰마(薩摩)에 잡혀 있는 피로인이 3만700여 명이나 되는데, 별도로 한 구역에 모여 산 지 장차 24년이 되어간다”(‘광해군일기(정초본)’)고 기록되어 있다. 전이생이 밝힌 숫자가 다소 과장일 수 있으나, 한 지역에만도 3만 명이 넘는 피로인이 있다는 기록은 당시 피랍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전쟁이 끝난 후 조선 조정은 피로인을 고국으로 불러들이려 했다. 그러나 실제로 돌아온 수는 공식적으로 5000∼7000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돌아온 이가 적은 이유는 일본 측의 비협조, 조선 조정의 어정쩡한 피로인 대우 정책 등을 꼽을 수 있다. 피로인들은 고국으로 돌아와서도 죄인처럼 차별과 멸시를 받았다. 천민 출신은 돌아온 뒤에도 천민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귀환한 양반들도 대부분 관직에 임용되지 못한 채 재야에서 살아가야 했다. 조선은 일본으로 끌려간 자체를 절의(節義)를 잃은 것으로 곱지 않게 보았던 것이다.



사가현(일본)=안영배 전문기자 oj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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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고고고

2018.02.19 15:08:17
*.116.51.241

저때 나라의 지도층은 머하고 있었을까?

♥마테호른

2018.02.19 16:38:38
*.223.30.96

우리 조상들이 노예로 끌려간곳 ...
일본은 절대 용서 못한다

다크호스s

2018.02.19 17:16:20
*.7.231.35

하이고...;;;

알프스낙엽소년

2018.02.20 17:34:11
*.233.45.114

늘 민초들만 고생고생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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