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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 자세

글을 쓰는 자세

교양 교수님께서 시험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보내주신 글쓰기의 자세와 마음가짐이야.

 

어떤 교양보다도 더 가치있고 뜻깊었다고 생각해.

 

좋은 글이어서 개붕이들도 한 번 읽어보는게 어떨까 생각해서 가져와봤어.

 

 

마지막 편지

 

지식의 근원은 입니다. 철학자들의 복잡한 논의도 결국 에서 시작해 로 끝납니다. 존재론에 앞서 인식의 구조를 먼저 따지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외부 사물을 받아들이는 인지 구조를 모른다면 모든 지식은 모래 위에 쌓은 성처럼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란 것이 그저 환상에 불과한 것이라면 내가 알고 있는 것들 모두 환상에 불과합니다.

자연과학자들의 연구 역시 결국 인간에 대한 탐구에서 시작합니다. 우주의 신비를 탐구하는 천체물리학자도 결국 인체의 신비로 시선을 돌립니다. 그렇게 많은 지식이 축적돼 있지만, 지구를 두 바퀴 반이나 도는 길이의 우리 핏줄이 어떻게 생성됐는지 모릅니다. 우주에 대해 모르는 것만큼 우리 신체, 생명에 대해 모르는 게 많습니다.

내가 무엇을 안다고 하는 것은 를 알 때 가능합니다. 볼록 거울에서는 실물보다 작게 나타납니다. 오목거울은 더 크게 보여줍니다. 찌그러진 거울에선 찌그러져 나타납니다. ‘가 인종적 편견을 갖고 있다면 피부색이 다른 사람, 나와는 다른 문화와 종교는 야만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왼쪽과 오른쪽에 악과 선의 의미를 부여하는 전통 속에서 산 사람은 왼손잡이를 불운을 가져오는 존재로 봅니다. ‘를 모른다면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가짜일 수 있고, 환상이거나 환청일 수 있습니다.

는 지식의 근원일 뿐 아니라 우리 삶을 바르게 이끌어주는 진리와 지혜의 근원입니다. ‘를 모르고서야 어찌 내가 진실로 바라는 것, 내게 진실로 필요한 것,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알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기독교는 하느님(하나님)을 아는 것 곧 나의 헛됨과 신의 주인됨을 아는 것이 모든 지식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불교의 가르침의 처음과 마지막에는 이뭣꼬(도대체 란 물건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있습니다.

이 나라에서 가장 똑똑하다는 이들이 겪어야 했던 불행은 에 대한 성찰은 외면한 데서 비롯됐습니다. 김기춘은 당대의 천재였고, 법률가였고, 법학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족으로부터도 외면당한 채 인생 말년을 감옥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그처럼 소년 시절 사시에 합격해 법조인들의 우상이 되었던 우병우 역시 감옥에서 보내고, 대법원장까지 지낸 양승태도 수감자가 되었습니다.

그리스의 철학자가 했다는 너 자신을 알라는 경구는 실은 아폴로 신전 앞마당 돌에 새겨진 말이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한 비극의 주인공에게서 비롯됐습니다. 오이디푸스입니다. 테바이의 왕자로 태어났다가 버려져 다시 코린토스의 왕자가 되었고, 자신에게 지워진 저주를 벗어나기 위해 헤매다가 스핑크스의 수수께기를 풀고 저주에서 풀려났다고 자신하고 돌아와 테바이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저주는 바로 그런 여정을 실현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한다는 운명은 그가 테바이의 왕이 되므로써 완성됩니다. 결국 자신의 두 눈을 찔러 맹인이 되는 것으로 저주는 완성됩니다.

오이디푸스의 신화는 를 안다는 게 근원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으로 읽히기도 하지만, ‘를 알기 위해선 얼마나 고통스러운 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증언이기도 합니다.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를 찾아가는 길목에서, 역시 스핑크스를 잡으려는 생부를 만납니다. 물론 그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를 이겨 테바이의 왕이 될 욕심에, 결투 끝에 생부를 죽이고 테바이의 왕이 됩니다. 그리고 어머니를 아내로 취합니다. 성찰의 기회가 주어졌지만, 욕망이 앞서 운명의 저주는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다산 정약용의 글 중에는 수오재기가 있습니다. 형님이 새로 지은 집의 당호를 수오재로 한 뒤 그 연유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다산이 쓴 글입니다. 다산은 말합니다. 권력과 재물과 명예를 지키기 위해 세상 사람이 안달인데, 도대체 내게서 떠날 수도 없고, 떠나지도 않는 를 지킨다는 게 얼마나 황당한 말인가? 수오재기는 그런 의문을 제기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한 번 돌아보니 세상에서 자신을 지키는 것만큼 힘든 것이 없었습니다. 잠시 한눈팔면, 명예를 위해 의리를 저버리고, 돈을 위해 인(너그러움)을 잃어버리며, 권력을 위해 예를 버립니다. 그리하여 지니고 있는 한 줌의 명예와 재물과 권력은 물론 저의 생명까지 잃어버리는 게 바로 입니다.

나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나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성찰입니다. 나는 지금 습관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편견에 사로잡혀 세상사를 바로보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사사로운 이해타산에 매여 친구와 이웃을 버리는 것은 아닌가, 순간의 분노와 격정에 못 이겨 사태를 그르치는 것은 아닌가?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1990년대 유행하던 김국환의 타타타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가사 중에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당시 이 노래는 이렇게 개사되어 불리곤 했습니다. ‘나도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나에 대한 무지, 그리하여 이웃과 세상에 대한 무지를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찰에는 여러 길이 있습니다. 가장 격렬한 방식이 불교의 참선일 것입니다. 싯다르타는 온갖 고행 끝에 보리수 밑에서 부처를 이뤘고, 달마대사는 동굴 속에서 7년간 면벽수도 끝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스님들은 일년에 100일씩 두 차례 참선 수행을 합니다. 기독교로 넘어가면 참선은 기도가 됩니다. 기도 중에는 관상기도가 있습니다. 내 안에서 존재의 빛인 신과 만나려는 것이 관상기도입니다.

4(인의예지)에 비추어 를 바르게 세우는 것을 으뜸으로 삼는 건 유교입니다. 수신이 이루어진 후에 가족도 나라도 천하도 평화롭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데카르트처럼 철학적인 논증도 가능합니다.

모두 좋은 길입니다. 하지만 일상생활을 영위해야 할 사람들이 스님이나 성직자 혹은 도학자나 철학자의 길을 가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평범한 이들이 갈 수는 없는 길입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길이 글쓰기입니다. 특히 공부하는 학생이라면 글쓰기만큼 를 알고 또 나를 지키는 방법은 없을 것입니다.

글쓰기의 전 과정은 나를 탐색하는 과정입니다. 준비단계에서부터 마무리 단계까지 나 자신과 대화를 나눠야 합니다. ‘는 무엇을 알고 나는 무엇을 모르는지 따져 물어야 합니다. 의견이나 주장이 있다면 그 근거를 꼬치꼬치 따져야 합니다. 논리적 허점도 파고듭니다. 기억에 대해서도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실재인지 환상인지 따집니다. 대화치고는 참으로 피곤한 대화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 의 바닥은 드러납니다. 얼마나 나의 지식은 짧고 얕으며, 기억은 왜곡되어 있고, 의견은 습관이나 편견에 젖어 있으며, 판단이 어설픈지 보여줍니다. 그리하여 더 많은 자료를 탐색하게 되고, 근거를 찾게 되며,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추론을 하게 됩니다. 오이디푸스가 좀 더 신중했다면, 욕심을 이루기 위해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훗날 알게 되었지만, 그가 죽인 사람은 바로 제 아버지였습니다. 그의 조급함은 그에게 던져진 첫 번째 저주, ‘아버지를 죽인다를 현실로 만들었습니다.

글쓰기를 생각하기와 동등하게 여기는 이유입니다. 좋은 글은 생각이 정리된 글입니다. 반대로 나쁜 글은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글입니다. 다른 사람의 주의 주장을 어설프게 옮기거나, 근거가 없는 억지를 멋대로 쏟아내는 글입니다. 그런 글을 쓰는 사람은 상황이나 여론에 따라 자신의 생각과 신조를 손바닥 뒤집듯이 바꿉니다. 결코 자신을 지키지 못할 사람입니다.

글쓰기는 자신의 생각과 논리를 바로잡아줄 뿐 아니라, 몸과 마음의 병도 함께 고칠 수 있도록 합니다. 곰팡이나 세균은 햇살 아래 노출되면 없어집니다. 음습한 곳에 있을 때만 독성을 마음껏 퍼트릴 수 있습니다. 마음의 병은 습관과 오류와 왜곡과 휩쓸림이라는 어둠 속에서 싹트고 깊어집니다. 이성의 빛 안으로 들어오면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절망 불안 혼란 망상 따위의 이른바 소아병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 모든 어둠을 직시해야 합니다. 나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 내 안의 소아병들과 맞서야 하고, 무지를 파헤쳐야 하고, 그런 장애물 건너편에 있는 빛의 세계를 내다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조금만 노력한다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정리해야 하겠습니까. 나와의 대화의 결과 혹은 정리된 생각을 어떻게 글로 옮겨야 할까요. 고민의 내용, 정리된 수준, 자신만의 호흡에 따라 스타일(문체)는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문체는 달라도, 글로 옮길 때 지켜야 하고, 또 지키면 좋은 몇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우선 정직해야 합니다. 숨기거나 왜곡해서는 안 됩니다. 정직하지 못할 경우 억지가 끼어들고 꾸밈이 들어갑니다. 그런 글은 진실성을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진실성은 글의 생명입니다. 생명을 잃었으니 죽은 글입니다. 정직하려면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용기있게 자신의 상처와 결핍과 시행착오를 드러내야 합니다.

메시지는 단순하고 명료해야 합니다. 복잡해선 안 됩니다. 비비 꼬고, 죽죽 늘리고, 이것저것 이어붙이는 것은 사실 저의 부실한 생각을,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감추기 위한 것입니다. 단순하고 명료하려면, 문장이 간결해야 합니다. 하나의 문장에 하나의 장면, 하나의 생각이나 하나의 장면만 담아야 합니다. 견고한 내화벽돌을 쌓아 집을 짓듯이, 간결하면서도 견고한 문장으로 단락을 짓고, 장을 만들고, 글을 구축해야 합니다. 암호처럼 꼬인 문장으로 이루어진 이른바 전공 서적은 내다 버려도 됩니다. 그런 글을 쓰는 학자들에 대해서는 학문적 깊이나 진실성을 의심해도 좋습니다.

부지런해야 합니다. 좋은 글은 견고한 사유와 간결한 문장, 풍부한 지식(혹은 정보)과 논리적 구성으로 이루어집니다. 사유가 견고하고, 문장이 간결하며, 구성이 유기적이라면 그 이상으로 좋은 글은 없습니다. 지식과 정보는 여러분 손안의 디지털 기기로 확보하면 됩니다. 과거처럼 머리에 쥐가 나도록 외울 필요가 없고, 기억력이 좋을 필요도 없습니다. 무엇이 필요한지 파악하고, 부지런히 손을 놀려 찾는 노력만 필요합니다.

따듯해야 합니다. 자신의 생각, 의견 기억 감정 등에는 엄격해야 합니다. 진위와 논리적 맥락을 따지는데 엄격해야 하고, 과장과 허세를 걸러내는데 단호해야 합니다. 그러나 글은 촛불과 같은 것입니다. 자신을 태워 주변을 밝히는 역할을 합니다. 나에게는 엄격하되, 독자에게는 따듯해야 합니다. 자상해야 하고, 부드러워야 하며, 섬세해야 합니다. 내가 아프다고, 내가 혼란스럽다고 징징대고, 신음하고, 고함을 질러서는 안 됩니다. 글은 불빛이고 소리이고 향기입니다. 비록 나에게서 발원한 것이라도 운명적으로 타인을 향하도록 되어 있고, 그들의 어둠을 밝히고 아픔을 위로해야 합니다.

글쓰기는 힘든 작업입니다. 그러나 들인 노력에 비하면 더 큰 보람과 결실을 가져다줍니다. 사람의 집중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생리적으로 기껏해야 30분에서 1시간 정도라고 합니다. 30~40분 정도 공부나 일을 하고 10분 정도 쉬라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정도 집중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전공 서적을 10분 이상 집중해서 읽는 일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수학이나 과학은 물론 어학이나 인문학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실례가 화두를 든 스님들의 모습입니다. 아무리 참선에 능한 스님이라도 잡생각과 졸음과 싸우기 위해 허벅지를 꼬집고, 심지어 송곳으로 찌르기도 한답니다. 흐트러질 때마다 뒤에서 죽비로 후려치는 입승 스님의 조력을 받기도 합니다. 화두를 들고 단 5분만 지나면 오만가지 잡생각에 머리가 혼란스럽고, 1시간도 안 돼 천근만근의 졸음이 눈꺼풀을 짓누른다고 합니다.

글쓰기가 여러분에게 가져다주는 선물 가운데 하나가 집중력입니다. 글을 쓰는 동안 여러분의 정신 기능은 최고의 가동상태에 들어갑니다. 기억력, 추리력, 연산력은 물론 감각기관도 맹렬히 돌아갑니다. 일단 글쓰기에 탄력이 붙으면, 301시간은 쉽게 지나갑니다. 익숙해지면 익숙할수록 집중하는 시간, 완전 가동 시간이 늘어납니다.

자동차는 물론이고 어떤 기계도 길을 들여야 합니다. 아무리 성능이 좋은 자동차라도 평소 저속으로만 달렸다면 고속도로에서 충분한 속도를 낼 수 없습니다. 기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동하지 않고 썩여 두면 제 성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사고력도 그렇습니다. 글쓰기는 여러분의 기억, 분석, 추리, 연산, 판단력을 크게 신장시켜 학습에 많은 도움을 줄 것입니다. 여러분의 감각 기능을 섬세하게 연마해 줍니다. 연인 친구를 포함한 이웃들의 여러 감정을 구석구석 느끼고 공감하게 해줍니다. 그것은 더 든든하고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구축하는 토대가 될 것입니다.

이제 글쓰기 강의는 끝났습니다. 아쉬운 게 많을 겁니다. 돌아보면 성찰, 인권, 민주주의, 행복, 아름다움, 사랑, 공감, 소통, 윤리 등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생각날 것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쓰라는 거지? 지난 한 학기 동안 무엇을 배운 거지? 새삼 의문스러워질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 답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글쓰기는 외로운 작업이라는 사실만 상기하겠습니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나의 글쓰기를 대신해줄 인공지능은 탄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인공지능 소설도 탄생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입력된 일정한 패턴을 반복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세상 사람은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경험이 있고, 감정과 기억이 있고, 이것을 소화하는 패턴이 있습니다.

비결이 있다면, 오로지 다음 세 가지뿐입니다.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첫 강의 때 했던 이야기입니다. 하루에 30분 정도 꼭 하루를 정리하는 글쓰기 시간을 갖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을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강의든 술자리든 인간관계 등 가장 인상적이고 상징적인 것 한두 가지만 정리하면 됩니다.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쓰세요. 농부가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작물을 가꾸듯이 여러분도 읽고 생각하고 쓰십시요. 그 과정에서 아마도 여러분은, 그동안 찾아 헤매던 삶의 목표와 방향을 발굴할 수도 있고, 자신감과 의욕도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 행복한 삶을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모든 순간은 결정적순간입니다. 나의 모든 순간들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새로운 출발을 하는데, 늦는 법이란 없습니다.

의미는 주어져 있지 않다. 그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발견해냈기에 의미 있는 것이 아닐까.”

고맙습니다.

 

 

. 앤 라모트의 편지

<글쓰기 수업>의 저자 앤 라모트가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함께 공부한 이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글과 글쓰기에 대한 작가의 태도와 철학이 잘 녹아 있습니다. 일독하세요.

-글을 쓴다는 것은 바다에서 무시무시한 태풍이 불어올 때 배 위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과도 같다. 노래는 태풍을 잠재우지는 못하겠지만, 사람들의 마음과 영혼의 불안을 덜거나 잠재울 수 있다.

-글을 쓰는 동안 당신은 모든 것을 내주어야 한다.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상처와 고통, 죄와 실패 등 그 모든 진실을 꺼내 주어야 한다. 그런 주는 행위는 그 자체로 보상 받는다. 작품을 출간하는 일은 중요하지 않지만, 주는 사람이 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중요하다.

_글을 쓰려면 먼저 티끌을 제거한 시선으로 주변을 돌아보아야 한다. 어떠한 기술보다도 세상에 대한 외경심을 갖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그러자면 바깥세상으로 나가 많은 사람을 만나고 소통하며 그들의 고통과 희망을 동시에 이해해야 한다. 편협하고 어두운 나르키소스적인 관점으로는 누구에게도 희망을 주지 못한다. 희망을 주지 못하면 글이 아니다.

-글쓰기는 고통스러운 것만 아니다. 글쓰기는 그 자체로 너무나 많은 기쁨, 새로운 도전거리를 제공한다. “글을 쓰는 동안 머리는 아이디어와 통찰력으로 활발하게 돌아가고, 전혀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한다.”

-더 많은 기쁨을 얻기 위해서는 아이러니하게도 더 많이 주는 것이다. 주면 줄수록 차고 넘치는 기적을 낳는 것이 글이다. 글은 사랑의 또 다른 얼굴이다. 독자로부터 보답을 기대하기 전에, 주는 것 자체로 보답을 받는 것이 작가. ‘거대한 고아원인 세상에서, 홀로 실려 온 응급환자처럼 아프고 외로운 모든 인간이 갈구하는 것은 결국 사랑이다.

-글쓰기는 삶의 질병에 대한 치유제.

삶의 모순과 고통을 바라보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깊이 들어가 폭로함으로써 세계를 구하고자 하는 갈망만큼은 서로 다를 게 없다. 작가는 삶의 불완전함을 보여주고, 이를 통해 삶을 치유하기를 바라는 존재다.

-따라서 글쓰는 이는 절제해서 쓰되 생각은 웅대해야 한다.’

* “진실, 오로지 진실만이 글을 위대하게 한다

엮인글 :

코피쑤한잔

2020.06.16 06:48:12
*.86.253.110

길다 ㅠ

살빠진곰팅이

2020.06.16 16:19:36
*.109.156.173

나만 길다고 느낀게 아니었구나..ㅜㅜ

거제흑곰

2020.06.17 14:57:55
*.70.51.27

ㄱ....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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