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행복하다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우연히!
예기치 않게 말이다
어제도 아침까지 술을 마시고 첫 차로 그 사람의 집에 들른 나는
그 사람이 집을 비운 틈을 타 서랍이며 옷장이며 하여튼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변태처럼 그 사람의 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호기심에 시작한 짓이었으나 그러고 있자니 점점 그 사람의 내면을 넘어 본질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사람이 좋아하는 옷, 그 사람의 서랍 정리법, 그 사람이 읽는 책, 그가 먹다 남긴 음식, 그의 은은한 체취...
연애란 상호간의 본질 탐색이겠지만
그 순간 나는 일방적으로 그의 내면을 훔쳐보며 그 사람의 밑바닥까지를 이해하고 있었다
서랍의 정돈된 방식을 보며 그 사람의 기질을 느끼고
그가 즐겨먹는 음식을 살짝 맛보며 그와 하나되는 기분을 느꼈다
그 사람의 존재를 마음 깊숙이 각인시키며 나는 뜨거운 사랑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한 번도 연애에 성공한 적이 없는 내가 스스로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랑법을 찾아낸 것이다
그 사람이 읽다 만 책을 따라 읽으며 그 사람이 되어 보려고 노력하고,
그 사람이 쓰다 만 손톱깎이로 나의 손톱을 잘라보기도 하며 나와 그의 연결고리를 확인했다
그렇게 그 사람의 방을 한참이나 뒤졌으나 그 사람은 좀체로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사람이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그 방의 주인이 바로 나였기에
지친 육체를 방바닥에 끌며
정신병자같은 내 얼굴을 보려고 거울 앞으로 향했다
나는 거울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움푹 폐인 눈, 불거진 광대뼈, 어수선한 머리카락, 날카로운 턱선...
슬프지 않았다
망가진 내 모습이 썩 맘에 들지 않았을 뿐
나는 오래도록 씻지 않아 더러워진 몸을 깨끗하게 씻고 파해쳐진 방을 깔끔하게 정리한 후에,
아무런 목적지도 없이 그렇게 나의 방을 떠났다
나는 지금 그곳에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이 지저분한 여관방에서 잠들었다가 다시 깨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뿐이다
하지만 또 어김없이 눈이 떠지고 말겠지
아 정신이 흐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