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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병을 치유하겟다며 강력하게 정책을 밀고나가며 장기집권을 하던 철의 여인이라 불리던 마가렛 대처 가 드디어 세상을 떠났다.
박근혜 대통령이 6년전 자신의 롤모델이라 할 정도로 국내 정치에도 영향을 끼친 대처여사...
현재 그녀에 대한 찬양일색인 한국
보수언론들의 평가처럼 그녀는 과연 위대한 정치인 이였을까?
자 이제부터 그녀의 진실을 보자.
"그의 유산은 공공의 분열, 개인적 이기심, 탐욕의 숭배였다. 이 모든 것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인간 정신을
속박했다."
“그가 남긴 이념은 21세기 들어 세계적 금융위기와 함께 논란의 대상이 됐다”
“대처가 씨름한
전후의 실패한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지만, 그의 실패한 해법으로 돌아가서도 안 된다”며 “그의 무덤 앞에서 춤을 춰서도 안 되지만, 그의 국장을
치르지 않는 것도 옳은 일이다”
이것이 영국 <가디언> 의 마거릿 대처 전 총리의 사망 이후 그녀에 대한 평가다.
1980년대 이후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함께 세계적인 신보수주의 혁명을 이끈 대처와 <대처리즘>이다.
전 세계를 힘겹게 만들고 있는 금융위기의 근원도 대처가
남긴 유산이다.
대처의 집권시절은 20세기 영국에서 가장 심각하고 빈번한 폭동의 시기였다.
1979년 11월 집권한 대처가 물려받은 비대한
노조권력 등 영국의 상황은 분명 치유해야 대상이기는 했다. 당시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던 독일이나 북유럽 나라들은 사회적 결속을 깨지 않고 경제
회복과 역동성을 회복했다. 반면, 대처의 치료법은 영국에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줬다. 같은 보수당인 데이비드 캐머런 현 영국 총리도 그가 여론을
분열시켰다고 지적했다.
대처가 외교적 해결을 반대하면서 강행한 포클랜드전쟁의 놀라우면서도 멍청한 승리, 이 전쟁 덕을 본 그의 두번째 총선 승리와 총리직 취임,
신자유주의 사상의 정책화와 집행,
작은 정부가 아니라 시장을 보호하려는 강력한 정부 운용으로 인한 분쟁의 일상화,
불공정한
인두세 도입과 유럽연합과의 갈등.
대처가 아니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이 모든 것을 대처는 단적으로 밀어붙였고, 이는 그의 몰락을 부르고
영국의 사회적 결속을 와해시켰다
영국 경제를 되살렸다는 게 대처의 최대 업적으로 꼽히기도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논란은 많다. 그의 집권은 불황으로 시작해, 불황으로 끝났다. 1979년 11월 집권한 대처는 1980년 초 성장률이 -4%까지 떨어지면서
1930년대 대공황에 준하는 불황을 겪다가, 80년대 중후반 성장률이 7% 가까이 오르는 경기회복을 달성했다. 하지만 그가 총리에서 물러난
1990년 영국은 성장률이 1%를 밑도는 불황에 다시 빠졌다. 그의 집권 기간 연평균 성장률은 2.3%로 전후 평균에 못미친다.
더 큰 문제는 경제의 양극화다. 계층간, 지역간 양극화가 극심해졌다. 1980년대 중반의 경기회복은 런던과 영국 동남부 지역에 집중됐다.
주택경기 호황과 북해 유전 개발에 따른 투기적인 가구소비 증가에 기댄 것이다. 모든 제조업을 사실상 포기하고, 런던의 금융산업만을 육성한
정책으로, 영국의 나머지 대부분의 지역에 영원한 산업공동화라는 상처를 남겼다. 경기회복 시기에도 실업자는 더욱 늘어, 집권 초기 150만명에서
그 두배인 300만명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독단적인 정부 운영으로 공공 분야에 대한 각종 국고 지원을 대폭 삭감하며 빈부 격차를
심화시켰고, 영국 경제 위기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정책은 내놓지 못했다
그는 반공주의를 내걸고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과 맞섰다.
반노조주의를 내걸고 영국의 공공부문 노조를 무력화했다. 포클랜드 섬의 영유권을 주장한 아르헨티나를 무력으로 격퇴시키고, 북아일랜드 독립군을
진압했다. 무엇보다 신자유주의를 내건 그의 경제 이념은 1980년대 이후 세계를 <금융자유주의 체제>로 변모시켰다.
포클랜드
전쟁 승리로 인기를 끌었지만,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를 친구로 대접하고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를 테러리스트로 깎아내리는 등 그의 반공 일변도 외교
행보는 전 세계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그를 철의 여인으로 불리게 한 핵심은 일련의 사영화 정책이다.
1979년부터 1990년까지 11년간 영국 보수당 집권을
이끌었던 그는 강력한 반 노조-반 복지의 기치를 들고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과 민영화를 밀어붙였다.
1979년 11월 영국석유를 시작으로
13년 동안 항공, 전신전화, 화물, 항만, 통신, 호텔, 가스 등 국영기업을 줄줄이 매각했다. 1980년 178만여명에 이르렀던 공기업
노동자는 1992년 47만명으로 급감했다. 이 과정에서 4차례나 노동법을 바꿔가며 "합법적으로" 노동자들의 저항을 물리쳤다.
대처의
정치 인생 최대의 고비는 적자에 허덕이던 일부 국영 탄광을 폐업하고 수만 명의 탄광 노동자를 해고하겠다는 계획에 반발하여 1984년 일어난
전국적인 탄광 파업이었다. 대처는 파업을 강경 진압하고 매스컴을 자기편으로 만들어 여론몰이에 나섰다. 결국 탄광 노조가 파업을 해제하면서 승리를
거둔 대처는 더욱 강력하게 정책을 추진했고, 당시 시대상은 영화 <풀 몬티> <브래스드 오프> <빌리 엘리엇>
등에도 잘 그려져 있다.
대처 전 총리는 대신 국민주 방식의 사영화를 택했다. 하층민과 중산층에게 공기업의 주식을
사들일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것이었다. 공기업 사영화를 명분으로 외국 자본에 경영권을 넘기는 한국 정부와
비교된다.
복지와 노조의 자리를 주식배당과 국민주주로 대체하고, 그들의 수익을 "자유로운 시장경쟁"을 통해
극대화하겠다는 게 그가 꿈꾼 보수정치의 원형질인 셈이다. 대처 전 총리는 이를 "대중자본주의"라 불렀다. 그가 영국 역사상 최장수 총리가 될 수
있었던 데는 이에 환호한 대중의 지지가 있었다.
대처의 경제정책이 영국을 짓누르던 부담을 어느 정도 완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과실의 대부분은 부자에게 돌아가고 부담은 급등한 부동산 가격과 고물가에 시달리는 저소득층이 지게 됐다.
계층간 불평등의 심화는 금융산업 육성을 명분으로 한 규제완화와 조세제도 개편의 결과였다. 그는 자신의 사임을 부른 인두세를 추진하는 등
조세 부과 기준을 소득과 자산에서 소비로 바꾸었다. 소득세율이 낮아졌음은 물론이다.
대처는 1983년, 1987년의 총선에서 연거푸
승리하여 3선에 성공하였으며 영국 역사상 최다임기를 역임한 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실업률과 물가가 상승하며 대처의 경제 정책이 한계를 드러냈다는
비판이 갈수록 커져갔다.
재정적자까지 겹치자 대처는 인두세 를 꺼내 들었고, 이에 반발하는 시위가 확산됐다.
자산소유자에게
징수하던 지방정부의 재산세를 대처가 일방적으로 모든 주민에게 부과하는 인두세로 변경해 버리자, 마지막 남은 충복인 제프리 호우 당시 부총리마저
등을 돌렸다. 결국 대처는 전후 가장 장수한 총리의 말로로는 어울리지 않게 사실상 보수당에서 축출돼 정계를 떠나야 했다.
또한 유럽공동체
가입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다른 유럽 국가들과 당 지도부의 비판에 직면하며 안팎으로 위기에 처한 대처는 결국 1990년 자진 사임하며 정계에서
은퇴했다.
곧이은 당수 선거에서 대처는 주위의 압력으로 도중 하차해, 배신감으로 인한 눈물을 보이며 총리 관저를 떠나야 했다.
외부에 알려진 것과 다른 대처 리더십의 실상이 폭로된 것이다.
1980년대를 풍미한 그의 정치는 21세기 들어
파산 선고를 맞았다. 대중자본주의의 이상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빈부 격차는 더 극심해졌다. 그의 방식을 본받은 공기업 사영화가 1980년대 이후
미국, 뉴질랜드, 네덜란드, 한국 등 전세계로 번졌다. 이를 통해 부를 얻은 것은 일반 주주가 아닌 금융자본가였고, 극심한 빈부 격차도 영국에서
세계로 확산됐다.
동시다발적이면서도 지속적인 금융위기를 겪고 있는 오늘날의 세계 경제는 대처 전 총리가 주도한 광범위한 사영화 및 긴축 정책과 이를 뒷받침한
신자유주의의 결과물이다. 21세기 들어 유럽 각국의 보수정당조차 작은 정부와 ㅋ ㅏ 지노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 금융 규제 및 빈부격차 해소를 역설하고
있으니 그녀가 얼마나 잘못된 길을 선택했는지 보여준다.
그래서 그런가?
모교 출신 총리에게 관례적으로 명예박사학위를 주던
옥스포드대학은 대처에게는 이 학위 수여를 거부했다.
그런데 이런 대처여사가 현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의 롤모델이라 한다.
걱정 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