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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고소한19 - 우리나라 스포츠 역사 감동의 순간들1|작성자 개똥벌레
[올림픽 즐겨찾기]
손가락 없는 '레슬링 영웅' 이상균
[조선일보 2004-06-11 17:54]
[조선일보]
경기가 끝났다. 그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위엄 있는 자세로, 매트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운동복에다 허겁지겁 두 손을 닦기 시작했다. 그에게 젖은 손을 내민다는 건 무지막지한 결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 코치들이 나를 에워쌌다. 마지막 결승전이 남아 있으니 절대로 긴장을 풀지 말라는 신호. 그렇지만 나는 꼭 들러야 할 곳이 있었다. 그를 만나야 했다. 상황판에선 그의 최종 성적이 4위라고 적혀 있었다. 그가 천천히 걸어간 어두컴컴한 복도를 지나서 마침내 대기실 문 앞에 이르렀다. 안에서는 한 남자의 나지막한 흐느낌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내 양 손을 다시 한 번 바라보고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를 방해하지 말자. 내가 아는 위대한 레슬러에게 나는 그렇게 경의를 표했다.
터키 사람 무스타파 다기스타니, 1956년 멜버른 올림픽 레슬링 자유형 밴텀급 금메달리스트의 회고다.
조막손 투수 애보트를 아는가. 1988년 서울 올림픽, 시범경기로 펼쳐진 야구에 참가한 미국 국가대표팀 투수. 메이저리그에도 진출, 언젠가 노히트 노런 경기를 한 적도 있다. 올림픽에 참가하지는 못했지만, 40년대 중반 남자 자유형 수영 세계기록을 연달아 경신하며 패전에 찌든 일본 국민의 가슴에 한줄기 빛을 심어주었던 사람이 있다. ‘후지산의 날치’로 불리던 후루하시(古橋廣之進)라는 이름의 사나이. 이 영웅에게는 왼손 가운뎃손가락이 없었다. 애보트나 후루하시는 장애를 극복했기에 추앙받는 것이 아니다. 인간 능력의 한계치를 넓혀놓은 존재이기에 존경을 받는 것이다.
레슬링의 공격은 일단 상대를 잡는 것으로 시동을 건다. 그렇다면, 손가락이 없는 레슬러를 상상할 수 있는가. 어느 레슬러가 있었다고 하자. 1951년 군에서 수류탄을 다루다가 왼손 엄지부터 세 개의 손가락이 없어졌다고 하자. 하늘이 무너지는 절망감을 뒤로하고 그 레슬러는 손목을 쓰는 리스트 록, 상대의 팔을 끼는 암 훅 등의 변칙기술을 연마하여 불가능을 뛰어 넘었다.
‘이것이 마지막 올림픽 경기라고 생각하니 눈물이 솟는 것이었다. 그러나 관중들 앞에서 눈물을 보일 수는 없었다. 세계인들은 그때까지도 대한민국을 전쟁의 상흔이 가시지 않은 나라라고 생각하며 가는 곳마다 동정어린 눈길을 보내주었다. 나는 한 나라를 대표하는 운동선수로서 내 조국의 품격을 높이고 싶었다.’ 패배가 확정된 순간에도 조국의 명예를 먼저 생각했던, 우승자 다기스타니가 경의를 표했던 진정한 영웅의 이름을 이제야 밝힌다. 그의 이름은 이상균(李相均), 대한민국 육군출신 6·25 참전 상이용사다.
(숭실대 문창과 교수 장원재)
'한국 레슬링의 대부'로 불렸던 이상균 전 대한체육회 태릉선수촌장이 5일 오전 별세했다. 향년 80세.
1931년 서울에서 태어난 고인은 47년 을지로3가에 있던 조선체육관 레슬링부에 등록하면서 체육계와 인연을 맺었다. 49년 전국신인선수권대회에 참가했고, 같은 해 제30회 전국체육대회 주니어플라이급에서 우승하면서 경량급 최강자의 위치를 굳혀갔다.
고인은 왼손가락 3개가 절단돼 맞은 위기를 극복하고 51년 제32회 전국체전에서 우승했으며, 56년에는 멜버른올림픽에 참가해 밴텀급 4위에 올랐다. 고인은 4년 후 로마올림픽 때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으며, 64년 도쿄올림픽과 68년 멕시코올림픽에 국제심판으로도 나섰다. 71년에는 국제레슬링연맹 특1급 국제심판이 됐다. 이후 71년 대한레슬링협회 부회장을 지냈고, 94년 제13대 대한체육회 태릉선수촌장에 임명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