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중후반 스키어들이 대부분이었던 한국의 스키장에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눈 위에서 서핑의 스릴을 즐기겠다며 나타난 사람들, 두발을 긴 널빤지에 묶고 옆으로 선 자세로 눈이 쌓인 비탈을 미끄러지듯 내려오는 스노보드족이었다. 20, 30대를 중심으로 조금씩 인기를 끌고 있던 그 무렵 절정의 인기를 자랑하던 ‘서태지와 아이들’이 힙합필이 충만한 스노보드 패션이라는 것을 유행시키면서 스노보드 인구는 급격히 늘기 시작했다. 그 즈음 스노보더들 사이에는 ‘보드 신동’이라고 불리는 한 아이가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 아이는 한국 스노보드 역사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며 성장해 스노보드 사상 한국최초로 올림픽 무대를 밟은 국가대표선수가 됐다.
장소제공 : 웅진플레이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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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보드 하프파이프의 선구자, 김호준 김호준의 보더 인생 출발은 4살 때, 물론 스키부터 신었다. 아버지가 스키용품점을 하던 시절, 뛰지도 못할 때부터 눈바닥에서 놀았다. 김호준의 표현으로 하지만 ‘눈 바닥에 있은지 20년’. 그러다 본격적으로 8세 때부터 스노보드를 시작했고, 그때부터 김호준의 외롭지만 거침없는 항해는 시작됐다. 처음 시작할 때 만해도 잘 알려지지 않은 종목인만큼 한국에는 스노보드를 체격적으로 가르치는 곳도, 가르칠 사람도 없었다. 김호준의 훈련은 전적으로 아버지 김영진씨의 몫이었다. 수영선수 출신인 아버지는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지식을 바탕으로 훈련 프로그램을 만들어 김호준을 훈련시켰지만 곧 아들의 급격한 성장세에 한계를 느끼고 말았다. 다행스럽게도 주변의 도움으로 진부중에 입학하게 되고, 강원체고를 거치며 체계적인 훈련을 받을 수 있었는데, 가장 큰 도움을 받은 것은 체력훈련이었다.
당시 강원도에도 전문적으로 스노보드를 가르치는 팀은 전무하다시피 했지만 크로스컨트리를 비롯한 동계종목팀을 보유하고 있는 팀들이 있었던 만큼 체력훈련만큼은 그 누구보다 확실하게 받을 수 있었고, 점프훈련이 필요한 김호준을 위해 트렘플린을 학교에서 구입해줬을 정도로 많은 지원을 받았다. 김호준만을 위한 트렘플린이었다. “지하에 집어넣어서 지상에 메트리스를 깔아서 점프훈련을 하는데 학교에서 구입해줬고 1m50cm 정도가 지상으로 올라오기 때문에 매트를 깔아야하는데 다른 종목선수들이 매트도 깔아주고 도와줘서 할 수 있었다. 주변의 도움이 컸고, 무척 고맙게 생각한다“며 김호준은 당시를 설명했다. 김호준은 이 고마움을 성적으로 보답했다. 국내대회를 제패한 것은 물론 중3 때 나간 전국선수권대회에서는 성인들까지 모두 물리치고 1위에 올랐다. 국내 실정상 큰 파이프도 아니었던 만큼 모두 실력들 대동소이했지만 결국 훈련량이 많은 김호준에게 우승트로피는 돌아갔다. 그리고 그 무렵 김호준은 국가대표가 돼 상상만으로나 가능했던 올림픽의 출전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꿈만 같았던 2010 밴쿠버 올림픽
“나는 태극마크를 다는 순간, 인생의 꿈이 올림픽이 됐다.” 김호준이 한국 스노보드 선수 최초로 출전했던 4년전의 밴쿠버 올림픽을 회상하며 꺼낸 첫마디다. 감히 ‘목표’라고 말하지도 못했던 단어가 ‘올림픽’이었다. “그건 꿈이었다. 자면서 꾸는 ‘꿈’말이다. 그냥 나는 내가 이룰 수 있는, 이루고 싶은 목표를 쫓을 뿐이었는데, 그 목표를 향해 가다보니 올림픽이라는 꿈을 이루게 됐다. 그때는 엔트리가 나왔는데도 계속 믿어지지 않았을 정도로 꿈만 같았다”고 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올림픽 엔트리는 올림픽이 열리기 전 2년 동안의 월드컵 등 각종 국제대회 포인트를 총합해 올림픽 직전의 상위 40위까지만 올림픽에 나가게 된다. 그러니까 꾸준하게 국제대회에 출전해서 어느정도의 성적을 유지해야만 올림픽출전이 가능한 일이다. 성적도 성적이지만 포인트를 따기 위한 대회 출전이 쉽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가장 큰 문제는 경제적인 부담이었다. 한 대회당 500여만원의 경비가 드는 상황. 협회의 지원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개인이 부담해야할 부분도 컸다. 어쩔 수 없이 부모님의 지원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밖에 없었다. 아버지 김영진씨는 그때를 지금껏 아들을 뒷바라지 하면서 가장 힘든 시간으로 꼽을 정도였다. “거짓말이 아니라 움직이면 돈이더라. 올림픽에서 내보겠다고 생각한 이상 거기서 멈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주변에서 빌리기도 하고 귀금속가게를 하는 아내가 금을 팔아 충당하기도 했다.” 주변의 정성이 통했던 걸까. 김호준은 2010 밴쿠버 올림픽을 앞둔 2년동안 좋은 성적을 이어갔다. 2008년 스위스 레이즌에서 열린 유럽컵에서 생애 첫 국제대회 우승을 차지했고 2009년 중국 하얼빈에서 열린 동계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는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또 국제스키연맹 월드컵 포인트도 꾸준하게 모아 당시 월드컵 랭킹 34위로 밴쿠버 올림픽 무대를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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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올림픽은 생각보다도 큰 무대였다. “너무나도 크고 수많은 관중이 들어차 있는 경기장, 경사가 큰 하프파이프, 이런 환경과 시선들이 나를 너무 긴장하게 했다. 출발이 안될 정도로 다리가 떨리고 안움직였다”며 밴쿠버 올림픽에서 긴장했던 당시를 회상했다. 당연히 결과가 좋을 리 없었다. 출전 선수 40명 중 26위에 그치며 결선에 진출하지 못하는 아픔을 겪었다. 하지만 그 경험은 김호준에게 ‘꿈’이 아닌 올림픽에서의 ‘목표’를 갖게 했다.
4년 전과는 다르다.
목표가 생긴 만큼 해야할 일들도 명확해졌다. 4년 동안 제자리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림픽 무대에 서니까 한계를 뚫고 싶다는 마음으로 업그레이된 기술습득에 매진했다. 일단 자신의 주특기를 최대한 살리기로 마음먹었다. 김호준의 주특기는 세바퀴(1080도)회전이며 그 중에서도 옆으로 회전하는 ‘스핀’에서 많은 점수를 받아왔다는 걸 감안했다. 그동안 김호준은 회전을 할 때 세바퀴를 돈 후 두바퀴반이나 두바퀴만 도는 프로그램을 선보였는데, 이정도의 기술로는 더 나은 성적을 낼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지난해부터 첫 세바퀴를 돈 후에 또다시 세바퀴를 돌고 그 다음 연결동작을 이어가는 형태의 프로그램을 만들고 계속해서 연습했다. “세바퀴를 돌고 세바퀴를 도는 것이 무척 어렵다. 왜냐하면 스노보드에서 왼발을 보드에 올려놓고 오른발로 땅을 딛는 게 편하면 ‘레귤러’며 그 반대를 ‘구피’라고 하는데 나의 경우에는 세바퀴를 돌고 나면 구피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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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겨로 말하면 뒤로 떨어지는 건데 그 상태에서 다시 세바퀴를 도는 것은 무척 어려운 기술이다. 그 정도의 모험은 해야 올림픽에서 원하는 성적을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열심히 연습한 끝에 내 인생 최초로 꿈에 그리던 이 기술을 지난 겨울 실전에서 성공했다.”고 밝혔다. 올림픽에서 프로그램을 선보이는 작전도 바꿀 예정이다. 김호준이 그동안 일단 예선을 통과해야겠다는 생각으로 1차 시기에는 '안전한' 동작을 하고 2차시기에서 모험을 걸어보는 작전을 폈다면 이제는 1차시기부터 큰 기술들을 선보일 예정이다. "그동안에는 나를 바라보는 시선들을 신경쓰다보니 1차는 무조건 안전하게 가자는 생각이 깊게 박혔다. 점수 기본을 받고 가는 거니까. 두 번 다 난이도 높은 기술을 했다 안되면 주위에서 실망스럽게 보는 시선들이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올림픽에서 성적을 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소치에서는 처음부터 100%로 기술 게이지를 올려 높은 점수에 도전해 볼 예정”이라고 말했다. 김호준의 목표는 결선진출이다. 현재로서는 올림픽 2회 연속 출전도, 올림픽에서의 목표도 무난하게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포인트를 획득해야하는 것 뿐만 아니라 올림픽을 앞두고 열리는 만큼 선수들의 실력을 가늠해볼 수 있는 월드컵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2월 14일에는 핀란드 루카에서 열린 국제스키연맹(FIS) 주관 스노보드 월드컵 대회 남자 하프파이프 부문에서 김호준이 결선에 올라 최종 점수 67.25점으로 9위를 차지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국내 스노보드 선수가 FIS 월드컵 대회 결선까지 진출한 것은 김호준이 유일한데 김호준은 2011년에도 월드컵 결선에 오른 적이 있지만 당시는 세계 정상급 선수들이 참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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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번 대회는 올림픽을 앞두고 미국과 캐나다, 북유럽의 쟁쟁한 선수들이 대거 출전한 상황에서 당당히 톱10에 진입했고 세계랭킹을 16위로 끌어올렸다. 게다가 대회 전에 어깨가 탈골되는 부상을 입어 최고의 기량을 보여주지 못했다는게 관계자의 전언이다. 김호준이 말하는 업그레이된 기술을 선보이지 않았는데도 세계적인 선수들과 겨뤄 9위를 차지했다는 얘기다. 부상이라는 변수가 등장하기는 했지만 이 상승세를 유지해준다면 김호준은 올림픽 파이널 진출이라는 자신의 목표에 좀더 다가설 수 있다. 이렇게 한국스노보드의 새역사는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다. 김호준의 외롭지만 멈추지 않는 도전 덕분에.
[ADDITION] '보더대디'로 사는 법
운동선수들의 가장 열렬하고도 영원한 팬은 바로 부모다. 그래서 선수들의 부모는 언제나 어떤 식으로든 그들 곁에 있다. 김호준도 마찬가지. 눈밭에 구를 때부터 두 번째 올림픽을 준비하는 지금도 아버지 김영진씨가 가장 친한 친구이자 조력자다. 김호준이 가장 존경하는 분이기도 하고, 또 여자친구 이야기까지 털어놓는 편안한 사이라고 말하는 아버지 김영진씨는 지금의 김호준을 만든 대표적인 ‘보더대디’다. 그는 보더대디의 삶을 이렇게 말했다.
● 가장 힘들 때는 언제였나요?
- 호준이 어릴 때를 생각해보면 국제대회 규격의 큰 파이프가 없는 열악한 환경도 속상했고 체계적인 훈련이 안되는 것도 마음아팠다. 그리고 호준이는 급성장을 해가는데 나의 지식과 경험에는 한계가 있을 때 역시 힘들었다. 그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금전적으로 고생할 때가 많이 힘들었다. 아마 운동선수 아버지 어머니들은 모두 그렇게 느낄 것이다. 그나마 나는 2000년대 초반 사업이 잘돼서 제법 큰 돈을 만졌는데, 호준이가 21세가 될 때까지 그 돈으로 버텼다. 다행히 돈이 떨어질 때 되니 후원사와 매니지먼트사가 생겨 지금은 호준이는 그분들에게 맡기고 나는 다시 취업전선에 뛰어든 상태다.
사진제공 : 아버지 김영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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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 곁을 언제나 지키는 아빠였다고 하던데요.
- 맞다. 호준이가 강원도에서 학교를 다니며 스노보드 선수생활을 하고 있어서 나도 나의 생활터전을 아예 그곳으로 옮겼었다. 호준이가 기숙사 생활을 하기 때문에 같이 살지는 못하고 내가 다른 집에서 먹고 자면서라도 나는 호준이 곁을 지켰다. 당시에는 스노보드 지도자들이 많지 않아 훈련하는 과정도 지켜보고 그것을 비디오로 남겨 훈련에 도움을 줬다. 그런데 그건 당연하다. 위험한 운동이다. 언제 다칠지 모르고 다치면 바로 병원으로 가야한다. 가서 병원에 함께 있는 것도 내 일이다. 그러다보니까 호준이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 고정된 직업을 가질 수가 없었다. 아마 많은 선수들의 부모님들이 이럴 것이다. 지금도 몸은 떨어져 있지만 마음은 언제나 호준의 곁에 있다. 외국 시합에 나가 있어도 SNS를 통해서 심리상태, 몸상태를 체크하고 관리해주는 일은 나의 일과 중 가장 중요한 일이다.
● 위험한 운동이다, 걱정이 많이 될텐데...?
- 나는 아직도 숙면을 취하지 못한다. 언제나 걱정이 되고 놀라서 깬적도 한두번이 아니다. 다치는 것도 자주 봤고, 병원생활도 많이 했다. 호준이만 해도 수술한 것만 5번이니까. 모험을 하지 않으면 발전하지 못하는 종목의 선수라 더 그렇다. 스노보드를 하는 모든 선수들은 부상을 무서워하면 안된다. 부상은 당연히 당하는 건데, 누가 부상을 빨리 털고 재활치료를 얼마나 잘 하느냐가 관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걱정과 스트레스, 그리고 두려움은 이제 불편한 친구 같은 존재가 돼버렸다.
● 아버지에게 올림픽이란?
- 호준이의 꿈이기도 하지만 나의 꿈이기도 했다. 밴쿠버 올림픽 출전은 우리 집안의 경사였다. 10명이 넘는 가족이 플래카드를 들고 현장을 찾아 열심히 응원했는데 너무 행복했다. 소치에서도 그 즐거움을 우리에게 안겨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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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만나는 스노보드 대표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