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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림사건

조회 수 2565 추천 수 0 2013.12.26 20:29:56

변호인 ‘부림사건’ 실제모델,

최병국 문재인 그들은 현재...황우여는 왜 억울하나


[뉴스엔뷰] 무서운 흥행몰이를 하고 있는 영화 ‘변호인’은 1981년 부림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현재 여야 모두에게 부림사건은 그야말로 잊을 수 없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故 노무현 전 대통령 때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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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림 사건(釜林事件)은 부산의 학림 사건이라는 의미에서 부림이라는 명칭이 붙여졌으며 신군부 정권 초기인 1981년 9월 공안 당국이 사회과학 독서모임을 하던 학생과 교사, 회사원 등 22명을 영장 없이 체포해 불법 감금하고 고문해 기소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당시 부산지검 공안 책임자로 있던 검사 최병국이 지휘했다. 당시 김광일, 문재인 변호사와 함께 변론을 맡았던 노무현 변호사는 이 사건을 계기로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됐다.



이 사건 관계자들은 “영장없이 체포·구속되어 대공분실에서 짧게는 20일부터 길게는 장장 63일 동안 몽둥이 등에 의한 구타와 ‘물 고문’ ‘통닭구이 고문’ 등 살인적 고문을 통해 공산주의자로 조작됐다. 독서모임이 반국가단체의 찬양활동으로 조작됐고 술집에서 두 사람이 만난 것이나 친구 개업식에 선물을 들고 찾아간 것도, 망년회를 한 것이 모두 현저히 사회불안을 야기시킬 우려가 있는 집회로 규정되어 처벌됐다”고 주장했다.



당시 이 사건은 국가보안법이 정권의 안보를 위한 도구로 쓰이는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대표적인 사례로 지목되어 노무현, 김광일 등이 무료 변론에 나서기도 했다.



이 사건은 김영삼 정권이 들어선 이후 ‘전두환 정권 초기 저항세력에 대한 탄압으로 조작된 사건’이란 정치적 면죄부를 받았으나, 법률적으로는 여전히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으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부산지법은 2009년 8월에 피해자들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문제는 이와 관련된 현재 정치권 인물들이 많다. 당시 검사를 맡았던 인물은 최병국 전 한나라당 의원. 18대 국회의원으로 울산 남구갑이 지역구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새누리당 황우여 대표는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지난 11월21일 비공개최고회의에서 “나는 부림사건과 상관없는데 자꾸 내 이름이 오르내린다”며 억울한 심경을 토로했다. 황 대표는 “부림사건이 아니라 학림사건인데…”라는 말도 했다고 한다.



학림사건은 서울 대학로 학림다방에서 전민노련이 첫 모임을 한 사건이다. 황 대표는 주심판사가 아닌 배석판사였다. 하지만 성격이나 명칭이 비슷하다 보니 인터넷 상에서 많이 오르내리고 있는 현실이다.



노무현 변호사와 함께 일했던 문재인 변호사는 지난해 민주당 대선 후보로 야권 단일 후보가 됐다.

기사입력시간 : 2013년 12월23일 [14:5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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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전 대통령은 막상 판사가 되고 변호사가 되고 나니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고 회고했다.

"돈 걱정 따윈 안 해도 되고 알아주는 사람 많고 굽실거리는 사람도 많아 편한 데로 생각하면 정말 살 맛이 나는 생활이었다. 그러다보니 출세해서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들을 도와주겠다던 어린 시절의 꿈은 간데온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노무현 회고록

노 전 대통령 역시 김광일 변호사에게 부림사건의 변호를 부탁받을 때만 해도 시큰둥했다. 그는 김광일, 이흥록 변호사 등과 함께 부림사건 변호인을 맡았다. 노 전 대통령은 당시 재판 변호인을 맡으면서 가치관이 송두리째 바뀌었다고 회고록을 통해 말했다.

"재판을 맡고서부터 나의 이기적인 삶의 껍질이 균열되기 시작했다. 대공분실에 끌려가 무려 57일간이나 가족들에게 아무 연락도 못하고 짐승처럼 지내야 했던 청년들, 매를 얼마나 맞았던지 온몸이 시퍼렇게 멍이 들고 발톱이 새까맣게 죽어버린 몸을 내보이면서도 얼마나 고문에 시달렸던지 변호사마저도 정보기관의 첩자가 아닌가 눈치를 살피던 파리한 몰골의 청년들,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의 죽었던 가슴은 서서히 분노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노무현 회고록


노 전 대통령은 실제로 1987년 2월7일 열린 고 박종철군 추모대회때 경찰에 연행되기도 하고, 잦은 구속 끝에 1987년 11월에는 변호사 업무정지 명령까지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나는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며 "내가 그 자랑스런 역사의 현장에 뜨거운 동지들과 함께 있었다는 것은 내가 지금까지 받고 있는 박해를 보상하고도 남는 것"이라고 밝혔다.

노 전 대통령은 부림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때부터 나는 학생사건, 노동사건 등의 무료 변론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한편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의 일을 내일처럼 도맡아 하게 되었다. 그러자 눈멀었던 나의 눈에 화려한 사회의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힘없고 가난한 사람의 희생과 고통을 똑똑하게 보게 되었고 시간이 갈수록 그들의 아픔이 가슴에 전달되어 오면서 어린 시절 나의 고통과 울분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1990년‘부림사건의 변호인’ 노무현 의원은 ‘부림사건’ 피고인이었던 송병곤씨의 주례를 섰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산 지역 변호사 시절 사무장이었던 장원덕 '법무법인 부산' 사무국장)


부림사건의 주요 인물들





최병국 | 부림사건 주임 검사


당시 부산지검 공안부 수석검사로, 부림사건 기소를 주도. 이후 김영삼 정부 대검 공안부장 및 중수부장으로 재직하며 한보사태 수사를 지휘하기도 했다. 전주지검장으로 재직하다 99년 대전 법조비리에 연루된 사실이 드러나 사표를 제출하고 울산 남구에서 국회의원 당선 및 한나라당에서 3선을 한 전 국회의원이다. 부림사건에 대해 "전반적인 수사가 대공수사대에서 진행해 송치되어 왔고, 관대하게 처분했으며 지금도 당시의 결정에 소신있게 처리했다고 생각한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고영주 | 부림사건 수사 검사


80~90년대 대표적인 공안검사로 부림사건은 물론 삼민투위사건, 민중교육사건, 한총련사건 등 굵직한 공안사건들이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 현재까지도 부림사건 및 관련 변호인들을 모두 공산주의자라 주장(월간조선 2006년 12월호)하는 등 참여정부 당시 핍박을 받았다며 노무현의 복수라고 연설.(동영상 : 애국시민사회진영 신년하례) 참여정부 당시 대검찰청 감찰부장, 서울남부지검장을 역임하다 현재 변호사로 재직하며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라는 보수단체의 위원장직을 맡고 있다.





서석구 | 부림사건 주임 판사


부림사건 주임판사중 한명으로 3차 구속된 이호철(참여정부 청와대 민정수석) 등에게 국가보안법 관련 무죄를 선고2했다 좌천되었고 이후 옷을 벗고 변호사로 활동하며 시민운동에 몸담았으나 근래 엔 과거 자신의 시민운동 사실을 참회하며 보수성향의 행보를 보이고 있다. 최근 TV조선 등의 종편 단골 패널로 참여중 (알려진 것과는 달리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는 부림사건 이전의 서울 학림사건 배석판사였다.) ( 서석구 블로그 : 노무현 전 대통령 자살과 유서가 주는 교훈 )






노무현 | 담당 변호인


당시 부산상고라는 출신 덕분에 세무회계쪽으로 부산서 다섯손가락안에 드는 변호사. 부산상고 동창회 회장을 역임할 정도로 기득권층에 속했다. 실제로 부산일보 사장을 지낸 김지태씨의 (주)삼화나, 조선견직 등 부산의 대표 향토기업 상속세 등 1백억원대 이상의 사건을 맡아 승률 90% 이상을 올리며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부림사건을 계기로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되며 이후 송기인 신부의 추천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국회의원은 물론 대통령직에까지 오르게 된다.





김광일 | 당시 부산지역 원조 인권변호사


유신때부터 부산지역 원조 인권변호사이자 부산 학생운동의 실제 자금줄이었으나 부림사건 당시 최병국 의 공범 협박으로 실제 변호는 맡지 못하고 자신에게 변호사시보 교육을 받은 노무현을 추천하게 된다. 훗날 노무현과 정치입문을 함께 하는 등 협력하지만 노무현이 3당야합의 YS와 결별하게 되면서 둘의 사이는 멀어지게 된다. 이후 김광일은 문민정부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냈으며 2002년 대선 당시엔 노무현 대통령후보를 비방하는 성명을 내기도 하고 이후 탄핵안 가결을 환영하기도 했다. (월간조선 2004년 4월호) 2010년 별세.





이흥록 | 당시 부산지역 인권변호사


1978년 창립된 '부산양서판매이용협동조합'의 초대 이사장을 지내고 재정적 도움을 주며 부산지역 민주화운동의 기틀을 만든 인물 중 하나. 부산양협은 79년 '부마민중항쟁'의 배후로 지목되는 등 당시 부산지역 민주화운동의 최대 조직으로 '부림사건'의 표적이었다. 부림사건이 터지자 당시 김광일을 대신해 변호인단(이흥록, 장두경, 박재봉, 정차두, 노무현)의 중심에 섰었다 . 참여정부 대통령 지명 국가인권위원을 지냈고 현재 변호사와 김치건강법 알리기에 매진하고 있다.





문재인 | 82년부터 노무현 변호사와 길을 함께 한다.


경희대 총학생회 유신반대 학생시위를 이끌었던 그는 82년 8월 사법연수원을 수석으로 수료하였으나 유신시위 경력으로 판사임용에서 떨어진다. 이후 부산에서 개업 준비중 사법고시 동기인 박정규(전 참여정부 민정수석)로부터 노무현 변호사를 소개 받는다. 그해 노무현과 법무법인 '부산'을 개업한 뒤 평생을 동지로 함께 한다. 최근 부림사건 변호 사실을 구실로 여권에서 빨갱이라고 공격하자 부림사건은 문재인이 사법연수원 수료 이전 사건이므로 재판과 무관하다고 당시 피의자였던 고호석씨가 증언한 바 있다. ( 미디어오늘 2013.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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엮인글 :

똥트릭

2013.12.27 09:26:42
*.36.151.65

역시 . . .고노무현대통령님

루나소야

2013.12.27 09:26:58
*.173.220.94

영화보면서 내내 들었던 생각은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죄가 없는 사람을 죄가 있다고 할때까지 고문할수가있었을까 하는 생각

크리드

2013.12.27 12:31:06
*.223.21.77

잘 읽었습니다.

ID아더

2014.01.01 20:57:34
*.224.151.136

감사합니다...잘 읽었네요.

즈타

2014.01.02 13:51:40
*.107.92.11

이떄나 지금이나

헬미♥

2014.01.15 19:01:47
*.152.20.238

잘읽엇습니다......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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