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를 시작한지 어느덧 햇수로 6년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더이상 예전 처럼 시즌방을 잡고 타지도 못하고, 초코바 두개만 먹고도
슬롭에서 8시간을 버틸 체력도 열정도 사라졌지만, 그래도 겨울이 다가오면
마음이 설레는 것은 여전합니다. 모든 스노보더들이 그렇겠지만요.

이제 서른 즈음의 제 나이에 제 생애 최고의 스노보딩 순간을 꼽아보려 합니다.


   -----------

1. 광란의 질주

   시기: 2002년 1월
   장소: 사이프레스 보울, 벤쿠버 캐나다

   제가 캐나다에서 처음 스노보드를 접한 것이 01-02 시즌입니다.
   이때 쯤이 한참 미쳐서 보드를 즐기던 시기이지요.
   정말 보드가 좋았고 그래서 하루종일 슬롭에서 지내도 배도 고프지 않던 시절이죠.
  
   하루는 제가 다니던 그라우스 마운틴 대신에 사이프레스 보울이란 곳을 찾았습니다.
   당시 저랑 같이 벤쿠버에서 지내시던 블랙콤님과 함께 야간 패스를 끊었죠.
   두 개의 산으로 이루어진 리조트 이곳 저곳에서 신나게 보딩을 하니 어느덧
   폐장 시간에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그 리조트에선 차가 없으면 스키장에서 제공하는
   셔틀버스를 타야 하는데 라이딩을 마치고 나니 시간이 애매한 겁니다.
   그래서 미친척 하고 쏠 작정으로 한번 더 타기로 했죠.

   정상에 올라서는 순간, 아뿔싸 시간이 너무 없는 겁니다.
   허겁지겁 바인딩을 채운 우리는 무작정 쏘기 시작했습니다.

   귓가를 지나치는 바람의 울음 소리를 들으며,고글을 껴도 눈이 실 만큼의 속력으로
   내달렸습니다. 평소엔 연습한다고 자세다 업다운이다 그렇게도 따졌지만
   그때 만큼은 그럴 겨를도 생각도 없었지요. 그냥 버스 놓치면 X된다는 생각만..

   너무나 빠른 속력과 익숙하지 않은 터레인, 제 머릿 속엔 오직 한가지 생각뿐,
   "조금만 실수해도 골로 가겠구나"
  
   귀는 계속 멍멍하고, 제 앞에는 블랙콤님 역시 미친듯이 활주를...

   우리 둘 밖에 없는 기나긴 슬롭,한밤중의 찬 공기를 가르며 쏘는 그맛!
   어느 순간 두려움은 사라지고 아드레날린이 팍팍 분비되면서 기분이 붕 뜹니다.

   '이래서 보드는 마약이구나...'

   제가 보드를 타면서 처음 겪었던 환각의 기억입니다.


2. 구름 위를 미끄러지다

   시기: 2005년 3월
   장소: 키로로 리조트, 사포로 일본

   2005년 3월은 결혼식이 있었던 시기, 따라서 그 전 겨울 시즌은 거의 보드를 접었었죠.
   결혼식이 의외로 이것저것 준비할게 많아서 주말마다 시간 내기가 힘들더군요.

   어쨌든 그 보상 차원에서 이해심 많은 저의 와이프는 보드 원정 신혼여행을 허락합니다.

   일본 본토의 설질도 후져진다는 3월, 그래서 장소는 북해도 사포로로 정했습니다.
   신치토세 공항에 내리는 순간, 길가 양옆으로 사람 키보다 높게 쌓인 눈이 반겨줍니다.

   당시 저는 지속적으로 카빙 턴만 해오던 시기라 보드에 어느 정도는 흥미를 잃었던 시기,
   그러나 역시 보더는 눈을 보면 강아지 마냥 즐거워 하는 본성을 가진 동물!
   저 역시 슬럼프였다고는 하나 리조트에 도착해서 슬롭을 보니 가슴이 벌렁거리더군요.

   가볍게 두어번의 라이딩을 마치고 곤돌라를 타고 올라가다 보니 슬롭 옆으로
   Out of fence 지역이 눈에 띕니다. 아무 흔적도 없는 파우더가 보입니다.
   설탕가루마냥 햇빛에 반짝이는 파우더를 보니 한번 뛰어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곤돌라에서 내리자 마자 와이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저는 펜스를 넘어 파우더로 갔습니다.
   캐나다에 있을때도 파우더는 맛을 좀 봤지만 이건 좀 다릅니다.
   벤쿠버쪽 파우더가 습기를 머금은 wet powder라면 여기 파우더는 dry powder!
   보드를 잡아 끄는 맛이 전혀 없고, 그냥 미끄러집니다..

   스스슥~ 스스슥~
   내가 얼마나 빠른 속도로 가는 줄도 모르게 계속 미끄러집니다.
   파우더이기에 보드 앞을 살짝 들고, 엣지를 주지 않고 베이스로만 탑니다.
   보드 뒤로 폴폴 날리는 눈가루가 마치 듀얼 머플러에서 나오는 흰 연기 마냥
   공중으로 흩어집니다. 이런걸 구름 위에서 타는 기분이라고 해도 될까요.

   무아지경으로 보드를 타던 저는 어느 순간 옆을 돌아봅니다.
   커다란 나무의 가지들이 보입니다. 어느 곳을 봐도 나무 줄기나 아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헉!'
   그렇습니다. 슬롭에서 너무 멀리 와 버렸습니다. 저 나무들이 파묻힌 걸 보면
   족히 눈의 깊이가 2미터는 넘겠습니다. 혹시라도 빠지면 죽음입니다 ㅡ,.ㅡ

   저는 그래서 살살살 보드를 달래면서 방향전환을 합니다. 파우더이기에 급격히
   턴을 하다가 엣지가 박히거나 노즈가 쳐 박히면 그대로 주저 앉습니다.

   보드를 타면서 그렇게 긴장되고 식은땀 나는 순간은 몇번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다시 그 위험을 감수하고 파우더 보딩을 하라면 또 할 것입니다.
   보드가 마약이라면 파우더 보딩은 그 중에서도 제일 쎈 놈이니까요.


3. 슬롭에서 맞이하는 새해

   시기: 2002년 마지막날 ~ 2003년 새해 첫날
   장소: 휘닉스파크

   2002년의 마지막날, 저는 보드장에서 새해를 맞이하기로 합니다.
   헝글의 몇 지인들과 송구영신 보딩을 계획했었죠.

   지금은 헝글에서 보이진 않지만 그때 당시 같이 보드타면 어울렸던
   많은 분들의 얼굴과 닉네임이 떠오르네요.

   2002년의 마지막 리프트를 타고 슬롭에 올라, 보딩을 하며 내려오던 중
   2003년을 맞이했습니다. 재야의 종소리도 없었고, 사람들의 환호성도 없었지만
   제 생애에 가장 기억에 남는 송구영신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취미를
   좋은 사람들과 함께 맞이하는 새해였으니까요.

   슬롭을 다 내려와서 서로 축하하고, 춥지 않냐고 챙겨주던 사람들,
   특별히 카빙이 잘되고, 기술이 잘 먹혀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좋아서
   좋은 기억으로 남는 보딩이었습니다.

   이튿날에는 몇몇 분들과 함께 첫곤돌라를 타고 정상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스카이님이 계신 곳 앞에 서서 다같이 묵념을 올렸죠.
   헝글을 만드셔서 좋은 사람들과 함께 보드를 즐기게 해서 고맙다고...


   ------------

   겨울이 다가 오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한번쯤 자신의 즐거웠던 스노보딩 추억을 떠올리며
   올 겨울에 대한 기대감을 키워 보는 것은 어떨까요?


엮인글 :

AG

2006.11.03 13:08:58
*.247.149.6

잘읽었습니다...

데크날라간다~조심햐

2006.11.03 13:18:49
*.119.159.228

아.. 그런 경험이 거의 없는 저도 가슴이 막 두근거리네여..

달과 600냥

2006.11.03 14:03:39
*.187.8.14

내 생의 취미와 주변을 다시함 돌아보게 따뜻한 글입니다. 근데 버스에는 오르셨나요?

그때그사람

2006.11.03 14:13:07
*.86.150.56

^^ 잘봤습니다~ 감회가 새롭네요

Mt.Grouse

2006.11.03 14:20:43
*.2.35.17

네, 버스에는 간신히 탈 수 있었습니다. ㅎㅎ

미친스키

2006.11.03 14:28:27
*.201.18.60

전 올해 4월 초에 키로로 갔었는데 설질은 여전하더군요. 하단부만 아주약간 습설정도?
참 국내에선 보기드문 눈폭풍속 스킹을 했다는....
근데 곤돌라에서 내려서 넘어간 펜스가 어디쯤인가요?

Kick

2006.11.03 15:28:03
*.27.105.145

저도 그라우스 마운틴은 자주갔는데 ... 버스로 갈수 있어서요...
위슬러하고 블랙콤이 더 좋던데요... 위슬러가따가... 돌아와서 단탄에서 밥먹고 그라우스로 ㅋㅋㅋ

음..

2006.11.03 16:28:20
*.147.24.18

부럽네요....죽기전에 원정한번 가볼수 있으려나...

DKDK

2006.11.03 17:00:52
*.75.229.65

저도 처음 보드를 캐나다에서 탔었드랬죠 ㅋ
머리 털 나고 처음 보드 탄 장소가 GROUSE MOUNTAIN 에 SCREAMING EAGLE이었어요 .
지금 생각 해 보면 SCREAMING EAGLE내려가는데 2시간 넘게 걸렸었던거 같군요.^^;;
그후 위슬러를 한번 갔었는데 거기서 보드의 참 맛을 느꼈었습니다.동네 스키장 같은 아기자기한 맛이 있는 그라우스 마운틴과는 달리 위슬러는..진짜 흔히들 하는 말로 스케일이 틀리더군요..저도 그라우스님과 비슷한 경험 있어요 .위슬러 갔었는데 한번만 더 타고 갈려고 했는데 길을 잃어 버려서 다른 사람들을 많이 기다리게 했던 기억이 있네요 ^^;;;

d야생원쉥b

2006.11.03 20:50:08
*.140.154.240

한밤중의 찬 공기를 가르며 쏘는 그맛!
어느 순간 두려움은 사라지고 아드레날린이 팍팍 분비되면서 기분이 붕 뜹니다.
=====================================================================================
100%공감합니다 맆트 대기할때도 저도모르게 휑휑놈처럼 싈싈 쪼개고 있죠;;

간지간지간질보더

2006.11.03 21:23:07
*.29.63.35

와 ~~ 정말 잼나게 읽었어요 ㅋ

티미

2006.11.03 23:36:06
*.214.75.2

와~ 정말 잼나게 읽었어여. 저도 빨랑 잊지 못할 보딩을 맞이하여야 하는데~

Nice Jay

2006.11.03 23:57:31
*.226.178.251

전 캐나다 록키산맥의 반대편에서 보드를 탔던터라..... 파우더보딩이라면.. 흠. 아마 제가 타본 레이크루이스의 뒷산 더블블랙을 말하는 듯하군요... 거기도 꽤 dry했었는데.. 밴쿠버는 겨울에도 비내린다면서요?

캐넌슈터

2006.11.04 00:18:47
*.230.164.90

싸이프레스 파노라마에서 보이는 벤쿱 야경이나_
그라우스에서 보이는 벤쿱야경_
특히 제설기가없는 싸이프레스에 자연눈들 . . 휘슬러는 말할것도 없죠 . .
저도 첫씨즌은 싸이프레스에서 보냈습니다_ 그립군요 . . ㅡ.ㅜ

Mt.Grouse

2006.11.04 01:06:37
*.2.34.99

벤쿠버 다운타운에 비가 내리면 그라우스 마운틴에는 눈이 내립니다 ㅎㅎ
그리고 그라우스 The Cut 슬롭에서 내려다보이는 노스밴과 라이온스 게이트 브릿지, 다운타운 야경..
무슨 화로에 숯이 다 타들고 난 후 붉은 불씨가 듬성듬성 남아있는 것 같이 멋지게 보이죠..
아흐... 저도 다시 가고 싶네요..ㅎㅎ

sky3002

2006.11.04 03:21:08
*.142.237.68

아름답습니다...*^^*

비욘

2006.11.04 09:13:30
*.104.213.198

읽기만해도 가슴이 설레이네요..

날아라삼돌이

2006.11.04 09:21:51
*.80.100.192

부럽습니다.

Kick

2006.11.04 11:59:47
*.27.105.145

올봄에도 노려봅니다 ㅋㅋㅋ

나뭐사죠

2006.11.04 12:32:59
*.174.132.19

역시 외국을... ㅜ.ㅜ

한솔

2006.11.04 13:16:56
*.76.19.229

그라우스님 집에서 쉬니까.. 옛날 추억이 좀 떠오르나 보내요? ㅎㅎ 근데.. 블랙콤님은.. 인제 보드 싫어서 안탄답니다..ㅋ

래몽

2006.11.04 17:33:12
*.150.185.43

우~와~~~ 이래서 다들 보딩의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하시는 거겠죠??

아직... 11월인데 마냥 설레이기만 합니다~!!

브아앙 づ@_@づ

2006.11.04 17:47:18
*.101.196.71

잼나게 읽었어요 눈감고 머릿속으로 생각하며 대리만족 했습니다 ㅎㅎ

어우야아

2006.11.06 13:27:30
*.95.187.27

아... 원정 저도 가고싶오요~

스카토로

2006.11.06 16:45:11
*.252.104.91

저도 원정가고 싶습니다.~~

두배로뛰어라

2006.11.08 00:18:27
*.195.75.96

그 때 심정을 잘 표현하셨네여 .. ㅠㅠ 왠지 상상이 간다...두근두근

스노우보딩뉴

2006.11.11 18:06:52
*.222.98.13

나이스~~~~~~~~~ 부러움 전 결혼하구 시즌 포기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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