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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의 국가

조회 수 746 추천 수 1 2012.10.26 18:52:17

일본이 대륙진출을 위해 1931년에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그 다음해에 만주국을 건설한 뒤,만주국 창설 10주년 기념 행사의 일환인 만주국 창설 10주년 기념 음악회에 쓰인 곡이 대한민국의 국가가 되어버린 어처구니 없는 현실.

 

 

 

'만주국' 의 가사
 
"10년 세월 제국은 무르익었다. 부지런한 땀은 보답받았네. 민중은 환호한다. 나라는 저 멀리 빛난다.

/하나의 생각으로 통일되어 사람들은, 희망에 차 번성한다. 난(蘭)은 환히 피었고, 새 질서의 첫 열매가.

/우리는 일본과 굳건히 연결되었네. 이 신성한 목표 속에 하나의 심장과도 같이, 영원한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라네, 독일이여 또한 이탈리아여 힘을 냅시다.

/영원한 봄날은 이미 가까이 와있네, 모든 족속 만족해할 그날이. 보라! 저 만주 평원 위에, 향기로운 난 환히 피었다."

 

 

 

애국가는 그동안 불가리아 민요와의 유사성 때문에 늘 시비가 붙었었다.

애국가의 원곡은 "한국환상곡"이다.
그런데 이 "한국환상곡"의 주요 선율이 <만주국> 이란 작품에서 따온 것인데,
공식명칭이 '대규모 혼성 오케스트라와 혼성 합창을 위한 교향적 환상곡 만주국'인 이 <만주국> 이란 곡은 일본이 대륙진출을 위해 1931년에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그 다음해에 만주국을 건설한 뒤, 1942년엔 만주국 창설 10주년 기념 행사의 일환인 만주국 창설 10주년 기념 음악회를 위해 쓰인 곡이다. 이때 이곡의 작곡을 안익태에게 의뢰, 이 때 안익태에 의해 만들어진 음악이다.
이 곡에서 '만주'라는 이름 대신 한국을 넣으면 그게 바로 애국가의 모체인 '한국환상곡'이 된다. 한국환상곡 내에 이미 만주국의 선율들이 들어와있다. 그 자체가 애국가의 선율은 아니지만 한국환상곡의 주요 가락 중 하나가 <만주국> 에 동일하다. 이 음악이 바로 애국가의 원곡인 "한국환상곡"의 모체가 되는 '대규모 혼성 오케스트라와 혼성 합창을 위한 교향적 환상곡 만주국'(줄여서 '만주국')이란 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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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곡 '한국 환상곡'이 멜로디의 일부를 이 음악으로부터 빌려왔다는 주장도 함께 제기됐다.

 

 



▲ <객석> 3월호는 음악연구가 송병욱씨의 기고문을 통해 독일 연방문서보관소(Bundesarchiv) 산하 영상기록보관소(Filmarchiv)에 존재하는 '안익태 영상물'의 내용을 소개했다.

음악연구가 송병욱(훔볼트대 음악학과 석사과정)씨는 공연예술전문지 <객석> 3월호 기고문을 통해 독일 연방문서보관소(Bundesarchiv) 산하 영상기록보관소(Filmarchiv)에 존재하는 '안익태 영상물'의 내용을 소개했다.

송씨는 기고문에서 공통 선율 이외에

▲'만주국' 축전음악의 원제에서 '만주국'을 '코리아'로 바꿔 넣으면 그대로 '한국 환상곡'의 원제목이 된다는 점

▲두 작품 모두 원래 3악장의 관현악곡이었다는 점을 들어 두 작품이 매우 유사하다는 주장을 폈다.

1935년 7월 미 필라델피아 음악대학을 졸업한 안익태는 그해 뉴욕 카네기홀에서 열리는 작곡 콩쿠르에 응모하기 위해 애국가가 없는 '한국 환상곡'을 작곡한 뒤 이듬해 6월 애국가 부분을 추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환상곡'은 1938년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초연된 후 1940년 이탈리아 로마를 끝으로 더이상 연주기록이 없는 데 반해 '만주국'은 1942년과 43년 잇달아 공연됐다.



"'만주국'과 '한국환상곡', 매우 흡사"



▲ 애국가의 작곡가 안익태 선생. 그의 알려지지 않았던 행적이 밝혀지면서 친일논란이 새롭게 불붙을 전망이다.

송씨는 더 나아가 이후쿠베 아키라(伊福部昭)의 1935년 작품 '일본 광시곡'이 '한국 환상곡'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추론도 내놓았다. 이후쿠베 아키라는 영화 <고지라>의 테마 음악으로 유명한 일본의 대표적인 작곡가인데, 지난달 8일 91세 나이로 타계했다.

송씨는 "미국 보스턴에서 1936년 '일본 광시곡'이 초연될 무렵 안익태는 필라델피아 심포니 클럽의 부지휘자였으므로 이 같은 사건을 몰랐을 리가 없다"며 "제목의 유사성과 창작시기로 볼 때 한국 환상곡은 일본 광시곡의 성공에 자극받아 작곡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송씨는 "이 가능성에 대해서는 앞으로 자세한 연구가 필요하다"는 단서를 달았는데, <객석>은 송씨의 두번째 기고문을 4월호에 실을 예정이다.

애국가를 만든 안익태가 일본의 괴뢰국가 만주국의 건국을 축하하는 음악을 만들고 지휘했다는 사실은 그의 이력에 뼈아픈 오점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

1945년 해방 후 안익태가 보완한 뒤 1948년 국가로 제정된 애국가의 정체성을 둘러싼 논란이 재개될 가능성도 있다. 1964년 지휘자 피터 니콜로프가 "애국가가 불가리아 민요(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를 표절했다"고 주장한 뒤 '새 국가 제정' 시비가 붙었지만, 1977년 정부와 한국음악협회는 국가를 새로 만들지 않는 것으로 결론내렸다.

친일문제연구가인 정운현(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사무처장)씨는 "안익태는 그동안 일제시대 한인음악가중에서 흠 없는 인물로 알려져 왔다"며 친일 주장에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안익태 탄생 100주년을 맞아 학술심포지엄을 준비하고 있는 안익태기념재단(이사장 김형진)은 지난 6일 이사회에서 심포지엄에서 안익태의 공과를 두루 다룬다는 입장을 정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안익태의 손자 미구엘 안(스페인 마요르카섬 거주)씨는 "할아버지가 나온다는 동영상을 보기 전에는 이번 건에 대해 뭐라고 말할 수 없다"는 의견을 <오마이뉴스>에 전해왔다.

/손병관 기자

이 기사 주소 http://media.daum.net/v/20060309105813029

» 일장기 걸린 베를린 필하모니홀 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2년 ‘애국가’의 작곡가 안익태 선생이 지휘를 한 독일 베를린 구 필하모니 홀 내부에 일장기가 걸려있다.

 조선일보 제공 (서울=연합뉴스)

▶ 진행 : 신율 (CBS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
▶ 출연 : 노동은 교수 (중앙대 음대)

- 기존 애국가는 폐기해야 한다?

그렇다. 안익태 선생의 애국가 이전에 우리나라의 공식적인 국가가 있었다. 1934년 프란체 에케르크가 작곡한 대한제국 국가나 독립군 진영에서 국가란 이름으로 불리던 독립가 등 애국가가 많다. 그러다가 해방 전후로 해서 안익태의 애국가가 불려졌다. 따라서 안익태의 애국가만 유일한 국가로 불려져야 하는 건 아니다. 애국가는 시대마다 그 시대를 반영해왔다. 이제는 21세기를 지향하고 민족의 미래를 위한 새로운 애국가가 나와야 한다.



- 누군가가 새롭게 작곡해야 한다?

 

그렇다. 그리고 애국가는 안익태 선생의 손을 떠나 한국인 스스로 만들어온 부분이 있다.

- 가사도 새롭게 써야 할까?

기존 애국가의 가사는 살리고 작곡만 새로 하거나, 시대 정신을 담아 가사까지 다시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애국가 교체 논의는 이제 필연적이다

 


▲ 1940년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안익태. (왼쪽 서 있는 사람)  
 
ⓒ2006 안익태 기념재단  

 

 

삶과 의식을 지배하는 '친일문화', 새로운 논의로 새 지평 열어야

'애국가'의 작곡자인 안익태가 나찌 치하의 1942년, 베를린에서 일본의 괴뢰정부인 만주국을 찬양하는 음악을 작곡하고 지휘했다는 영상물, 이 연주와 작곡 6년 전에 뜨거운 민족 사랑으로 썼던 '한국 환상곡'의 음률이 일장기가 휘장으로 내걸린 제국주의와 파시즘 찬양의 제단에 바쳐졌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안익태의 친일 가담 문제와 새로운 국가 제정의 문제는 이 기록 필름의 등장 때문에 처음 일어난 것은 아니다. 안익태가 자신의 스승이기도 한 후기 낭만주의의 대가 리하트르 슈트라우스의 일본 찬양 작품 '대일본축전'을 일본에서 지휘한 적이 있다는 사실은 그동안 음악계 내부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애국가'는 '애국가'대로 많은 시련에 봉착해야 했다. 특히 1964년 내한 공연을 가진 불가리아의 지휘자가 자국의 민요와 흡사하다는 이른바 '애국가' 표절 파동이 일었고, 그 이후 십여년이 지나서야 당시 박정희 정부는 새로운 국가 제정이 불가하다고 간신히 입장을 정리했지만 그 불씨는 완전히 꺼지지 않았다.

명백한 '친일음악가' 안익태를 감싸는 '친일운명론'

국내의 몇몇 음악대 교수들의 안스런 안익태 감싸기, 혹은 안익태 기념사업 재단 측의 곤혹스러운 변명,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부 언론의 퇴행적 물타기에도 불구하고, 안익태의 친일 행위는 이제 명백해졌다

2차 세계대전의 주축국 중심 국가의 수도 한복판에서, 나찌의 고위 관료들과 일본 황실 인사들을 앞에 두고 일본의 새로운 영토 10주년을 찬양하는 음악을 만들고 연주했다는 사실. 어떤 예술가의 친일 혹은 반민족 행위를 증명하는데 이 이상 더 무슨 자료와 연구가 더 필요하다는 것인가? 이 식민지 조선의 음악가가 일제의 특고(特高)들에 의해 무슨 약물에 중독되어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작품을 만들고 연주했다는 자료라도 필요하다는 말인가?

"그때 잘나간 놈들 중에서 친일 안한 놈 어디 있어? 니가 그때 살았어봐, 너도 별 수 없었을 걸? 아마 더 했을지도 모르지…."

이런 후안무치한 말들이야 과거사법 제정 때부터 숱하게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준동했던 것들이다. 평범한 사람의 내면을 교묘하게 파고드는 이 악마와 같은 논지는 역사적 인식이 박약한 요즘의 젊은 세대들한테 쉽게 전염되고 있다.

국가 교체는 필연, 통일조국 비젼과 한민족 일체감 내용 담겨야

안익태가 샌프란시스코 교회에서 망국의 교민들이 스코틀랜드 민요 '오울드 랭 사인'의 선율에 맞춰 '애국가'를 부르는 것을 보고 뜨거운 민족애로 지금의 '애국가' 선율을 지을 때만 하더라도 열렬한 민족주의자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수많은 식민지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 보여주었듯이 '대일본제국'의 대세를 수긍하고 적극적인 친일의 대오에 가담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것은 그저 한명의 음악가 안익태에게 강요된 운명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와 같은 변절의 처세에 대해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았겠냐의 온정론을 펴는 것이야말로 그 당시의 적극적인 친일 행위보다도 더 무서운 행동이다. 그것은 그 당시에도 친일의 강요에 저항했던 모든 이들에 대한 역사적 모욕일 뿐만 아니라, 반민특위의 폭력적 좌절 이후 여전히 청산되지 못한 식민지성의 남루한 잔존을 또다시 우리 스스로에게서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이 이렇다면 국가 교체 논의는 이제 필연적이다. 입맛이 쓰고 또 쓰지만, 나는 이것이 우리에게 작지만 의미심장한 새로운 전기를 제공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이 기회를 빌어 '애국가'와 그 작곡가뿐만 아니라 우리의 음악사에 종양처럼 붙어 있는 수많은 '식민지적 유제'를 청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그러나 그것을 답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국가는 통일 조국의 비젼을 담은, 남북한 거주민 및 해외 동포들의 일체감을 창조적으로 발현시키는 노래가 되어야 할 것이다. 정부는 정부대로 국가제정위원회도 만들어야 할 것이고, 예술가들은 예술가대로 할 일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 앞서서 선결되어야 할 것은 진실의 이름 앞에 우리 마음 속의 식민지 근성이 청산되는 것이다. '애국가' 뿐만 아니라 '해방가' 역시 제 자리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만이 진정하게 우리를 미래로 운반해 줄 것이다.

- 많은 예술가들이 30년대에 들어 친일로 돌아서지 않았나?

1937년 검색하기">중일전쟁 이후로 일본이 사상 통제와 탄압을 위해 본격적 작업을 하면서 친일로 돌아선 경우가 많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붓을 꺾고 낙향을 한다든가, 독일의 경우도 망명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하자 자살한 사람이라든가, 끊임없이 망명을 시도한다든가, 이렇게 제도권의 영화로움을 던지고 민족적으로 참된 길을 걷는 예술가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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