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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독도는 앞으로 대한민국과 일본 모두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한다. 반박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둘째,

어업구역을 설정할 경우 양국 모두 독도를 기점으로 획정하되, 중복되는 부분은 공동수역으로 한다.

셋째,

현재 대한민국이 ‘점거’한 현상을 유지한다. 그러나 경비원을 증강하거나 새로운 시설을 증축은 하지 않는다.



(노 다니엘 저 <독도밀약>)

"독도는 한일 모두 자국 영토"... 박정희의 검은 거래
8·29 경술국치일 유감... 정권 인정받으려 피해배상청구권도 실효시켜
김재홍 (jaehongk) 기자

한국의 입국 거부로 일본에 돌아온 이나다 도모미(稻田朋美), 신도 요시타카(新藤義孝) 중의원 의원과 사토 마사히사(佐藤正久) 참의원 의원 등 자민당 의원 3명이 8월 1일 밤 일본 하네다공항에 도착해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연합뉴스
울릉도

8월 29일은 101회째 맞는 경술국치일이다. 야욕에 찬 제국주의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치욕의 날을 또 다시 맞으며 요즘의 한일관계를 생각하니 더욱 심란하다. 100여 년 전 극악무도한 일제는 조선조 황궁에까지 자객을 보내 명성황후를 시해했다. 겁에 질린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하는 아관파천의 역사가 기록되기도 했다. 을사늑약과 한일병합 국치조약이 강압에 의한 것이었다는 증거다.

한일관계는 갈수록 유감이 깊어지는 것 같다. 1965년 체결된 한일기본관계조약과 여러 협정들이 그렇다. 그 후로도 계속 일본 각료들이 일제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망언이 이어졌다. 역사교과서 왜곡도 이어졌다.

"독도는 한국과 일본 모두의 자국 영토"... 박정희도 재가

얼마 전 일본 극우파 의원 3명이 독도 인근 울릉도를 방문하겠다면서 김포공항에서 소란을 피웠다. 우리 국민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 그러나 더 화가 나게 하는 것은 우리 쪽 친일 정권의 행태였다. 지난 5월 출판된 일본통 경제학자 노 다니엘의 <독도밀약>이라는 책자는 우리를 허탈하게 한다. 독도밀약설이 어느새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1965년 1월 11일 서울 성북동에 있던 어느 기업인의 자택 홈바. 당시 국무총리 정일권과 외무부 차관 문덕주, 그리고 김종필의 친형으로 막후 밀사 중 한사람인 김종락이 함께 있었다. 도쿄에서 날아온 우노 의원이 메모지를 꺼내 읽었다. 그의 보스인 일본 자민당 실력자 고노 부총재의 자필 메모였다.

"첫째, 독도는 한국과 일본이 모두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며 서로 이에 반론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둘째, 장래에 어업구역을 설정할 경우 양국이 독도를 자국 영토로 하는 선을 획정하고 두 선이 중복되는 부분은 공동 수역으로 한다.

셋째, 현재 대한민국이 '점거'한 현상을 유지한다. 그러나 경비원 증강이나 새로운 시설의 건축이나 증축은 하지 않는다."

이 메모는 다음날로 대통령 박정희에게 재가를 받았다. 1961년 쿠데타 직후부터 군사정권의 수반으로서 한일회담을 시작한 박정희는 일제 군관학교 시절 은사와 군대 상관들의 지원과 조언에 크게 의존했다.

박정희, 도쿄서 옛 일본군 상관들에 공손한 인사

박정희.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박정희

1961년 11월 12일 박정희는 도쿄에서 이케다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갖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자유당 정권처럼 많은 청구권 자금을 요구할 생각은 없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정치적 배상 등을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여기서 일제 식민지배에 대한 피해배상 청구권을 포기하는 한일협정의 골격이 잡혔다. 정상회담에 이어 일본 정계거물들이 한자리에 모인 아카사카의 요정 '가와사키' 오찬에서는 일본군 출신 박정희의 더욱 굴욕적인 태도가 드러난다.

박정희는 다다미 위에 양손을 짚고 유창한 일본말로 예의 바르게 일본식 인사를 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미숙한 소생을 잘 지도해 주십시요."

그것은 비록 쿠데타정권이지만 그래도 일국의 지도자가 취할 모습은 아니었다. 그 자리에는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 재학 때 교장이던 나구모 예비역 중장도 동석했다. 나구모는 박정희가 매년 인삼을 보내주면서 예우해 온 일본군 상관이며 은사였다.

 

5·16쿠데타 이전에는 우리 정부가 일본의 식민지수탈과 전범행위에 대한 징벌적 입장을 견지했다. 36년간의 식민통치로 인한 피해배상 요구를 분명히 했다.

5·16쿠데타 정권, 국제적 승인 받는 데 급급

그러나 박정희는 무엇보다도 정치적 정통성을 갖지 못한 자신의 쿠데타 정권을 국제적으로 승인받는 것이 당면 목표였다. 또한 냉전체제 아래서 한반도의 유일합법 정부임을 인정받는 데 급급했다. 국내적으로도 정치적 기반의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해 일본인 옛 선배와 상관들의 도움이 긴요했다. 검은 정치자금이 일본 쪽에서 대량으로 흘러 들어왔다.

공화당 창당 자금을 만들기 위한 4대의혹사건 중 특히 빠친코와 새나라 자동차의 수입허가 비리가 일본 쪽과의 검은 거래였다. 미 중앙정보국의 특별보고서에 따르면 박정희 정권은 1961~65년 6개의 일본 기업들로부터 공화당 총예산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6600만 달러를 제공받았다.

박정희 정권은 1964년 계엄령과 1965년 위수령 아래서 한일협정을 강행했다. 1910년 국치조약을 일제가 강제했다면 1965년 한일협정은 친일 군부정권이 국민저항을 봉쇄하고 만들어낸 강압의 산물이다. 더구나 박정희 정권은 한일협정으로 국민 개개인의 대일 피해배상 청구권마저 실효 시켰다. 이것을 되살려 내기 위해서도 한일협정은 전면 재검토돼야 하며 국민의 피해배상 제소운동을 벌여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김재홍 기자는 제17대 국회의원을 역임하고 현재는 경기대학교 정치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며 민주평화복지포럼의 정책위원장 겸 대변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1.08.29 09:23 ⓒ 2011 OhmyNews

박정희 정권은 왜 독도지킴이의 손을 부러뜨렸나
[곽병찬 칼럼] 독도 밀약, 이제는 말해야 한다
한겨레
곽병찬 논설위원

[곽병찬 칼럼] 독도 밀약, 이제는 말해야 한다

군사독재 정권이나 보수정권이 가장 거론을 기피했던 문제는 희한하게도 독도였다.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릴 때면 일쑤 들고나와, 반일감정을 자극해 국면을 전환시키곤 했지만, 이들의 기본적인 태도는 무관심이었다. 이걸 모르고, 정치적 퍼포먼스에 말렸다가 선의의 피해를 본 경우도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게 홍순칠 독도의용수비대 대장이다.

역사적으로 독도를 지킨 건 국가가 아니라 민간인이었다. 조선조 울릉도와 독도에서 왜구를 내쫓은 건 민간인 안용복이었다. 해방 후 독도를 지킨 건 예비역 특무상사 홍순칠과 33인의 민간인이었다. 홍씨는 전쟁을 틈타 독도를 제집 드나들듯 하던 일본인들을 몰아내기 위해 의용수비대를 조직했다. 정부 지원도 없어, 가산을 처분하고 의연금을 모아 기관총·박격포 등을 구입하고 의용대도 모집했다. 수비대는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 함정의 침범을 두 차례나 격퇴하고, 가짜 해안포를 설치해 일본 함정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기지도 발휘했다.

문제는 그 열정이었다. 수비대에서 물러난 뒤에도 1969년, 1972년 독도개발계획서를 경상남도에 제출하는 등 실효적 지배를 강화하도록 재촉했다. 박정희 정권은 부담스러웠다. 홍 대장은 1974년 12월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사흘 동안 고문을 당했다. 중정의 요구는 더 이상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떠들지 말라’는 것이었다. 다시는 글을 쓰지 못하도록 그의 오른손을 부러뜨리기도 했다고 부인 박영희씨는 전했다. 학교 조례 때마다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떠들도록 한 정권이 왜 그러는지 홍 대장은 알 수 없었다.

전두환의 신군부에서도 똑같았다. 신군부는 1980년대 초 그가 독도 지킴이로 북한 방송에 소개되자, 그를 즉각 체포해 극렬한 고문을 가하여 간첩 조작을 하려 했다. 결국 고문 후유증으로 홍 대장은 1986년 숨졌다. 전두환 정권은 독도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민간인 출입을 막았고, 심지어 노래 ‘독도는 우리 땅’을 금지곡으로 지정했다.
독도

1965년 1월11일 서울 성북동 박건석 범양상선 회장의 홈바에서 정일권 국무총리와 일본 자민당의 실력자 우노 소스케 의원이 하나의 메모에 사인을 했다. ‘미해결의 해결’이란 원칙에 따라 성안된 다음과 같은 내용의 독도밀약이었다.

첫째, 독도는 앞으로 대한민국과 일본 모두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한다. 반박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둘째, 어업구역을 설정할 경우 양국 모두 독도를 기점으로 획정하되, 중복되는 부분은 공동수역으로 한다.

셋째, 현재 대한민국이 ‘점거’한 현상을 유지한다. 그러나 경비원을 증강하거나 새로운 시설을 증축은 하지 않는다.

(노 다니엘 저 <독도밀약>)

결국 미해결 상태를 해결로 간주하고, 독도 언급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주일 뒤 1년 넘게 교착됐던 정상회담 예비회담은 재가동됐고, 6월22일 한-일 협정이 체결됐다. 함께 발표된 한-일 어업협정은 독도 주변 해역을 공동규제수역으로 규정했다. 밀약 내용 그대로였다. 공동규제수역 혹은 중간수역 규정은 지금까지 지켜진다. 임기 말에 돌연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며 일전불사를 외쳤던 김영삼 정부도 독도 인근 해역을 잠정적 조치수역(중간수역)으로 수용했다.

밀약도 밀약이지만, 박정희·전두환 정권은 일본 정부와 민간에게서 막대한 정치성 자금을 받아 썼다. 박정희는 청구권 자금 이외에 1965년까지 5년 동안 6개 민간기업으로부터 6600만달러의 정치자금을 받았고, 전두환 정권은 출범하자마자 일본 나카소네 정부로부터 40억달러의 차관을 받았다. 그러니 독도를 물고 늘어지는 홍 대장을 가만두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일본에 대한 공세를 높이고 있다. 일왕까지 거론했다. 물론 뒷감당도 못하면서 쏘아대는 말대포라는 시각이 많다. 실제 박종우 선수는 그 피해자였다. 그러니 진정성이 있다면 밝혀야 한다. 독도밀약의 진상과 파기 여부를 말이다. 그래야 ‘독도 쇼’니 정치 선동이니 하는 소모적 논란을 막고 홍순칠, 박종우 같은 어이없는 희생도 막는다.



곽병찬 논설위원chankb@hani.co.kr



기사등록 : 2012-08-15 오후 08:17:54 기사수정 : 2012-08-15 오후 09:35:25
한겨레 (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독도문제 빌미된 ‘친일 군인’ 박정희의 ‘독도밀약’
5·16 쿠데타 50년…다시 뽑고 싶은 대통령 1위의 부끄러운 친일 행적
일본통 경제학자가 쓴 <독도밀약>…대일 저자세외교 낱낱이 파헤쳐
하니Only 김도형 기자기자블로그
박정희는 일본 극우파의 정치사상을 빌려왔다. 그는 일본 청년 장교들의 2.26 사건을 참고해 5.16쿠데타를 일으켰다.

5·16 쿠데타 50년…다시 뽑고 싶은 대통령 1위의 부끄러운 친일 행적
일본통 경제학자가 쓴 <독도밀약>…대일 저자세외교 낱낱이 파헤쳐

 16일은 육군소장 박정희가 김종필 등 일단의 청년장교를 이끌고 쿠데타를 감행한 지 50년이 되는 날이다.

 쿠데타 성공 반세기, 사망 32년의 지난 지금도 박정희의 인기가 높은 편이다. 더 좋은 민주주의연구소(소장 백원우 민주당 의원)가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서치뷰’에 의뢰해 9~10일 이틀간 자동응답방식 여론조사를 통해 990명을 대상으로 전·현직 대통령이 재출마했을 경우 지지의향을 물을 결과(복수 응답) 57.5%의 지지율을 얻어 노무현(47.4%) 김대중(39.3%) 이명박(16.1%)를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박정희는 재출마시 지지하지 않겠다는 의견에서도 가장 낮았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차기 대권주자 후보 지지도를 묻는 각종 조사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아버지 박정희의 후광에 힘입은 바가 크다.

다시 뽑고 싶은 대통령 1위, ‘박정희 신화’의 이면

 ‘조국근대화와 경제회생의 지도자’라는 박정희 이미지가 세월이 지나도 좀처럼 색바라지 않은채 어떤 면에서는 신화화하고 있는 것이다.

 박정희 정권이 1965년 6월22일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해 일본정부로부터 자금(3억 달러의 무상자금과 2억 달러의 장기저리 정부차관, 및 3억 달러 이상의 상업차관)을 조국근대화의 종잣돈을 마련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때부터 14년만에 타결된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 타결은 일본쪽에 많은 것을 양보한 대가였다.

 16일 발간되는 책 <독도밀약>은 박정희의 한일 회담을 둘러싼 저자세외교, 친일행적,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 빌미 제공 행위 등 박정희의 신화 이면에 숨은 또다른 실체를 낱낱이 폭로해 눈길을 끈다.

일본통 정치경제학자가 쓴 <독도밀약>
한일회담 둘러싼 박정희의 친일행적 폭로


 일본통 정치경제학자인 노 다니엘이 지은 이 책에 따르면 쿠데타에 성공한 지 5개월이 채지나지 않은 1961년 11월12일 박정희는 이케다 하야토 당시 총리와의 공식 회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혁명을 완수한 인간으로서 느끼는 것은 한-일 양국이 운명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우리 혁명정부는 이 기회를 잃지 않도록 한일 회담이 조기에 타결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일본의 한일문제에 대해 마음으로 성의를 보인다면 우리는(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처럼 많은 청구권 자금을 요구할 생각은 없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정치적 배상 등을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일본의 지원 자금을 필요로 했던 박정희는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보인 것이다. 노 다니엘은 “이같은 박정희의 말은 이케다에게는 생각지도 못한 뉴스였음에 틀림없었다”면서 “이렇게 양국 정상의 회담은 간결했지만 이후 국교를 정상화하겠다는 약속의 기본정신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정상회담 뒤이어 일본 정계거물이 한자리에 모인 아카사카의 요정 ‘가와사키’ 오찬 회동에서 박정희는 자신의 마음을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박정희 “잘 부탁드립니다” 예의바른 일본식 인사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졸업한 뒤 소위에 임관하기 직전인 1944년 6월 말, ‘견습 사관’으로 있을 때의 모습. 자료사진

박정희는 다다미 위에 양손을 짚고 예의 바르게 일본식 인사를 하며 이렇게 말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에게 젊다는 것 이외에 별다른 재산이 없습니다. 미숙한 소생을 잘 지도해주십시요.”

 지은이 노 다니엘은 “유창한 일본어 인사는 일국의 지도자가 아니라 후배의 그것이었다”고 지적했다.

 박정희는 정상회담에서 일본 지도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자신의 친일 경력을 동원하기까지 했다. 한국쪽은 정상회담 만찬 자리에 박정희의 만주신경군관학교 교장을 역임한 나구모 신이치로(1886~1963)이라는 예비역 중장을 참석시켜 은사와 자제의 아름다운 재회의 모습을 연출시켜 정해 약한 일본 정치가들의 가슴을 울려 경계심을 풀게 했다는 게 노 다니엘의 주장이다.

 나구모가 교장시절인 1944년 박정희는 3등의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유학하게 된다.

 나구모는 이렇게 인삿말을 했다고 한다. “제자 중에 일국의 최고 지도자가 나온 것에 대해 나는 눈물이 날 정도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나는 박 장군을 잘 기억하지 못했지만 박 장군은 번번이 고려인삼을 보내주셔서 덕분에 이렇게 건강하게 지냅니다.”

  박정희에 친밀감을 느끼고 있던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아베 신조 전 총리의 외할아버지)는 박정희를 요정 가즈오로 초대했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당시 박정희가 했다는 말을 이렇게 적고 있다.

“박정희, 군사혁명 때 메이지 유신의 지사들을 떠올려”

 “자기들 젊은 육군의 군인들이 군사혁명으로 일어난 것은 구국의 일념으로 타올랐기 때문이며, 일본 메이지유신의 지사들을 떠올렸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선배인 요시다 쇼인 선생과 다카스키 신사쿠, 그리고 구사키 겐즈이 등 처럼 했다고”

지은이는 이에 대해 “박정희는 기시를 비롯해 일본 정치인들이 존경하는 바쿠후 말기 지사들의 정신을 배워 ‘그들처럼’ 일본의 메이지 유신에 상응하는 ‘위로부터의 혁명’을 한국에서도 전개하고 싶다는 야망을 밝힌 것”이라고 평가했다.

 1948~1950, 1958~1963년 주한 미국 대사관에서 정무참사관으로 근무한 그레고리 헨더슨은 자신의 저서에서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혁명세력의 통치스타일에 대해서 옛 일본군의 쿠데타를 모방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상급장교들은 1930년 초반 일본 청년장교 집단이 일본의 문관정치에 대해 실력행사를 한 쿠테타를 머리 속에 담고 있었다.”

한일회담 최대 걸림돌 독도문제…독도밀약은 어떻게 진행되었나

1964년 6월3일 박정희 정권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해 한일회담 반대 시위대를 진압했다. 당시 시위에 앞장선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탄생한 ‘6·3세대’는 이후 유신독재 타도 투쟁의 전면에 서게 된다.
박정희가 한일회담에 얼마나 서둘렀는지는 한일회담의 최대 걸림돌이었던 이른바 독도문제에 대해 ‘미해결의 해결’을 시도한 일본정부와 독도밀약을 체결한 데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박정희는 외무장관, 주일 한국대사 등 공식 협상창구를 배제한 채 김종필의 친형으로 일본통인 김종락을 동원해서 막후협상을 맡겨서 결국 “독도·다케시마 문제는, 해결해야 한다는 것으로써 해결한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조약에서는 언급하지 않는다”는 밀약을 성사시켰다고 노 다니엘은 이 책에서 폭로했다.

 특히 독도밀약 1항은 “양국은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을 인정하며, 동시에 그것에 반론하는 것에 이론이 없다”고 허용함으로써 일본정부에 결국 독도밀약을 근거로 매년 영유권 주장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

 박정희는 1965년 2월17일 한일회담을 공식적으로 마무리하기 위해 서울을 방문한 시이나 에쓰사부로 외상의 환영 만찬 때 장군들을 응원단으로 동원하기 까지 했다.

 노 다니엘은 “5·16 주도세력과 12·12 주도세력의 또 다른 공통점은 둘다 ‘박정희 팬클럽’에 가까운 모임으로서 박정희의 가치관과 세계관, 특히 일본에 대한 관념을 공유했다”고 지적했다. 하나회 멤버들인 12·12주도 세력은 무엇보다 박정희가 보여준 일본식 군인정신에 동경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일본의 여류소설가 야마사키 도요코의 장편소설 <불모지대>를 애독하고, 그 주인공의 실제모델인 이토추 상사의 세지마 류조(2차세계대전 당시 작전 참모)를 존경했다.

군인 친일주의자들의 독도밀약 정신은 노태우까지 이어져

 실제 세지마는 하나회 출신의 전두환, 노태우에게 자신이 영향을 끼쳤다고 회고록인 <이쿠산가>에서 술회했다.

 “쇼와 55년(1980년) 3월께 이병철 회장에게서 연락이 와 ‘한번 꼭 방한하셔서 군의 선배로서 전두환, 노태우 두 장군을 격려하시고 조언을 해주기 바란다. 경제관계의 문제도 있으니 도큐 그룹회장 고토 노보루씨도 동행하셨으면 좋겠다’라고 요청해왔다. 고토씨도 이 요청을 받아들여 그해 6월 둘리서 방한했다. 우리의 안내역은 권익현(당시 삼성물산 상무, 육사 11기로 나중에 민주정의당 대표)씨로 그의 안내로 전 장군, 노 장군을 만났다”

 노 다니엘은 ‘군인 친일주의’는 본능에 가까운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정희 정권에 이어 전두환 노태의 두 군사정권이 존속한 1993년까지 소위 군인 친일주의는 지속됐다. 그 자신을 포함해 한국의 직업군인들은 기본적으로 친일주의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예전에 만주군관학교나 일제의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선배들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그들에게 일본과 사이좋게 지낸다는 것은 본능에 가까운 관념이었다”

 독도밀약의 정신이 박정희 시대를 넘어서 전두환과 노태우까지 이어졌던 것도 이런 배경이 있다고 노 다니엘은 강조했다.

   김도형 선임기자/트위터 @aip209


기사등록 : 2011-05-15 오후 12:31:33 기사수정 : 2011-05-16 오전 08: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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