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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바로 마오쩌둥 입니다

마오쩌둥은 중일전쟁 최전선에서싸운 장제스와 달리 자기 세력확장만을 꾀하고
국공내전후 국민당을 대만으로 내쫓은이후 황군덕에 자기가 권력을 잡았다고 한사람입니다

홍군 제4방면군 군사위원회 주석이던 장궈타오(張國燾)의 회상록에 따르면 마오쩌둥은 “애국주의에 현혹되면 안 되며 전선(前線)에서 항일영웅이 돼서는 안 된다”는 지침을 내린다. 그러면서 구체적으로 전력(戰力)의 70%는 공산당의 발전을 위해 사용하고, 20%는 (국민당과의) 타협을 위해, 나머지 10%는 대일(對日)작전에 사용하라고 지시했다.

일본군과 용감하게 싸워 팔로군(八路軍)이 강하다고 알려지면 일본군이 전력을 집중시킬 위험이 있기 때문에 제1선에 나서서 전투하는 것을 엄금(嚴禁)했다.

그러나 전장(戰場)의 장수들은 적을 이겨 전과(戰果)를 올리고 싶은 결기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펑더화이(彭德懷)의 백단대전(百團大戰)이다. 이는 펑더화이 팔로군 부총사령관이 백 개의 단(團)을 조직해 1940년 8월 일본군과 정면에서 싸운 전투로 일본군의 보급망에 커다란 손실을 입히는 등 큰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펑더화이에게 “그 정도 눈에 띄는 전투를 하면 안 된다”고 격하게 질책했다.

백단전투 외에 공산군이 일본군과 크게 싸운 전투는 평형관(平型關)전투 정도가 있을 뿐이다. 대다수의 경우는 소규모의 후방 게릴라전과 일반인과 국민당 병사들을 목표로 한 선전과 세뇌 작업이었다. 제1선에서 국민당군이 일본군과 싸우는 동안 공산당은 배후에서 세력 확장에만 골몰했다.

1939년 마오쩌둥은 판한녠(潘漢年)이라는 스파이를 상하이(上海)에 있는 일본첩보기관 ‘이와이공관(岩井公館)’에 잠입시켜 외무성의 이와이 에이이치(岩井英一)와 친숙해지도록 했다. 이와이 에이이치는 판한녠에게서 국민당군에 관한 군사정보를 취득했다. 그 대가로 고액의 정보제공비를 지불했다. 판한녠은 보름에 한 차례씩 당시 경찰관의 5년 치 급여에 해당하는 2000홍콩위안을 받았다. 상당한 거액이어서 이와이 에이이치는 외무성 기밀비를 너무 낭비했다는 이유로 이후 광저우(廣州)영사관으로 좌천될 정도였다.

가장 놀라운 것은 판한녠은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중공군과 일본군 간의 정전(停戰)을 제의했다는 사실이다. 판한녠은 당시 일본 육군참모본부 산하 ‘매(梅)기관’이라는 첩보기관을 운영했던 가케사 사다아키(影佐禎昭) 대좌를 통해 일본의 괴뢰정권이었던 왕자오밍(汪兆銘)의 특무기관 ‘76호’와도 내통했다.

1936년 이후 형식적이긴 하지만 제2차 국공합작을 했기 때문에 중공군이 국민당군의 군사정보를 취득하는 것은 쉬웠다. 일본이 전쟁에서 싸운 것은 중화민국의 장제스(蔣介石) 정권이었다. 따라서 일본으로서는 국민당군에 관한 군사정보를 얻는 것은 전쟁을 유리하게 이끄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중공군은 국민당으로부터 군복과 무기를 지급받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국민당군에 대한 군사정보를 일본 첩보기관에 팔아넘겼다.

1956년 마오쩌둥은 중난하이(中南海)에서 엔도 사부로 일행에게 “일본군이 우리 중국에 진공(進攻)한 것에 감사한다. 그 전쟁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지금 여기에 없었을 것이다” “그 전쟁이 있었기 때문에 흩어진 모래 같던 인민이 단결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마오쩌둥은 ‘침략’이나 ‘침공’이란 어휘를 일부러 피했다.

이후에도 많은 일본인이 마오쩌둥을 만날 때마다 ‘사죄’를 하는데도 마오쩌둥은 싫증이 났는지 “황군(皇軍)에 감사한다”라는 말을 연발하면서 “과거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했다.

마오는 1964년 7월 10일 일본사회당의 사사키 고조와 구로다 히사오 등이 방중했을 때도 “국민당에 패주해 홍군의 병력이 30만명에서 2만5000명으로 줄었지만 일본군이 국민당군과 싸워주는 8년 동안 120만 군대로 늘어 기사회생(起死回生)했으니 어찌 일본의 황군에 감사하지 않을 수 있느냐”고 말했다.

마오쩌둥은 ‘난징(南京)대학살’에 관해서도 언급하지 않았다. 교육현장에서도 기본적으로 가르치지 않았다. 이는 중국 인민의 반일감정과 일본 국민의 반중(反中)감정을 억제함으로써 일본을 장제스의 타이완이 아닌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싶다는 계산도 있었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이유는 ‘난징대학살’이 발생했을 시기 마오쩌둥의 홍군은 옌안이라는 깊은 산중에 도주한 상태여서 일본군과는 그다지 전투를 벌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은 1953년 2월 이래 20여 차례 난징을 방문했지만 단 한 번도 일본군의 ‘난징대학살’을 언급한 적이 없다. ‘난징대학살’이 중국교과서에 실리기 시작한 것은 개혁개방 이후의 일이다. 난징대학살기념관(侵華日軍南京大屠殺遇難同胞紀念館)이 건립된 것도 중일전쟁 40주년인 1985년 8월 15일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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